‘청산리대첩’의 영웅, 백야(白冶) 김좌진

  • 기자명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입력 2023.09.1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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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가 교내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외부로 이전하는 방침에 대해 찬반 논쟁이 격렬하다.  100년 전(1920년 6월) 만주에서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일본군 1개 대대를 무찌른(일본군 157명 사살, 300여 명 부상) ‘봉오동전투’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전쟁 사상 첫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넉 달 뒤인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은 홍범도 장군 등과 화룡현 청산리(靑山里) 80리 계곡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지에서 일본군 5천여 명을 맞아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한국 무장 독립전쟁 사상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일본군은 약 1,200명이 전사하고 200명이 부상했지만, 독립군은 60명의 전사자와 90명의 부상자만 발생하였다. 김일성이 역사적인 항일 승리 전투라고 선전하는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 1937년)’와는 차원이 다른 대승이었다.

김좌진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명문대가 집안 출신으로,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인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어릴 적에 한학을 수학한 후 16세에 상경하여 17세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 19세에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된 후 귀향해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북간도에 독립군 양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에 나섰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13년에 출옥하였다.

1915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8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대한정의단을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일본군은 1921년 4월까지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화계획’이란 이름의 독립군 근거지 소탕작전에 나섰다. 일본군은 한인 3,700여 명을 살육하고, 한인촌 가옥 3,500여 채 등을 초토화한 ‘간도참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한국 독립운동의 흑역사인 ‘자유시사변’은 한국 독립군을 러시아 적군 산하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내분이었다. 1921년 6월 28일, 적군과 그들 편에 선 한국인 공산주의자 집단이 자유시 외곽에서 한국 독립군을 포위 공격하여 독립군 1,700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강제 노역형에 처해졌다. 홍범도는 자유시사변 3개월 전 이미 무장해제를 주도한 적군의 한인 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역사적 사실이 ‘홍범도 흉상 이전’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자유시사변으로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군은 사실상 궤멸하였다. 자유시로 들어가려던 백야는 러시아 적군의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이범석 등과 다시 만주로 돌아가 ‘신민부’ 설립에 참여했다. 이 와중에 백야의 독립군 부대는 마을 주민에게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징수했고, 징병제·둔전제를 시행하면서 민심이 크게 돌아섰다.

1930년 1월 24일. 백야는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공산당원 박상실의 흉탄을 맞아 향년 42세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아들 김두한과 손녀 김을동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항일 독립전쟁 사상 가장 빛나는 승전으로 한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준 백야 장군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危邦憂客轉憂思(위방우객전우사) 위태로운 나라 애국지사가 (이국에서) 나라 걱정하고

槿域三千海賊馳(근역삼천해적치) 무궁화 삼천리 강토 (국권 강탈한) 해적이 차지했네

月下磨刀常勝礎(월하마도상승초) 달 아래에서 칼을 갈아 상승의 주춧돌을 놓고

嶺上秣馬出兵基(영상말마출병기) 재 위에서 말을 먹여 출병의 기초를 닦았네

靑山大捷遺民悅(청산대첩유민열) 청산리대첩 승리하자 망한 나라 백성은 기뻐했고

自由風波獨立萎(자유풍파독립위) 자유시참변 무장해제로 독립군 활동은 시들어말랐네

不惑散花讐未報(불혹산화수미보) 나라의 원수를 되갚지 못하고 40세에 순국했으나

驚天動地萬人追(경천동지만인추) 세상을 놀라게 한 대첩 모든 국민이 추모하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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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님 2023년 3월 간도문화체험마을 강연 모습

 

아래는 e고려신문 편집의 견해입니다.

의열단 활동을 하시던 운암 김성숙 선생님께서 1924년 북경에서 창간한 " 황야 " 100주년에 대한 의미를 함께 되세기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지혜와 역량을 모아 주시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윤봉길 시인님은 임강서원 선현분들과 그 후예이신 안중근 대장군님과 안창호 선생님과 김동삼 선생님 등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월초대사님의 가르침을 받으신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운암 김성숙 선생님 그리고 운허 이학수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민족계몽운동과 반제항일 상하이 의거 등을 하신 분입니다.

광동 김창호는 광동중학교 1학년 부처님 오신날 이 자리에는 서로군정서 창설과 한족신보 기념비와 의열단 기념비와 " 황야 " 문학비 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난해 2023년 부처님 오신날까지는 그리 설파하였습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님 등의 가르침을 따른 윤봉길 시인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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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는 e고려신문 김창호의 한길문화운동 관련 내용입니다.

    필자는 조부님으로부터 임강서원 선현분들의 가르침을 받고 광동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월운 큰스님으로부터 월운 큰스님의 스승님이신 운허대사님의 스승님이신 월초대사님의 수제자이신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운암 김성숙 선생님의 반제항일삼일혁명 등에 대해 배운 뒤 군산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하여 독어독문학과 유럽의 대략적인 역사를 배운 뒤,

    월초대사님과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운암 김성숙 선생님 그리고 운허대사님이 인류사적인 측면에서 종교지도자로서 독일의 마틴루터나 프랑스의 칼빈 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하다는 것을 깨닳게 되어 독일 유학의 뜻을 접고 산티아고 순례길 뛰어 넘는 월초대사 삼일혁명 임강서원 순례길 만들기 운동을 기반으로 광릉숲유네스코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도 빌리브란트가 나치 척결과 동방정책을 펼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정치와 인사 행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통일과정을 보면 우리의 삼한일통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유럽의 몽마르뜨 언덕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찾으려 적금을 들기 보다 오히려 임강서원 선현분들과 월초대사님과 삼일혁명 등의 가르침이 서려 있는 우리의 역사 현장을 찾아 생산적이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작품을 쓰고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차분하게 생각해 보아 주세요.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 보면 우리가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유럽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청교도 혁명, 프랑스 혁명 등은 반역이고 쿠테타가 아닌지요?    저들 땅의 탐욕스런 절대군주로부터 지배받던 이들이 자유를 얻어 하느님의 사람들을 강탈하는 집단약탈로 바뀌어 아프리카 흑인들을 강제로 잡아다 노예로 삼고 매매하고 아편 등까지 팔아 세상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세태를 양산시키지 않았나요?

    윤봉길 시인님과 같은 홍주 출신의 만해 선생님께서 출가한 지 10년이 되던 1917년 겨울 백담사 오세암에서 견성한 뒤에 읊은 오도송(悟道頌)을 생각하면 윤봉길 시인님의 상하이 의거는 최고의 공연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남아가 가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중, 나그네 수심에 오래 잠긴 이가 몇이던가) / 一聲喝破三千界(일성갈파삼천계, 한 소리 질러 삼천 세계 깨뜨리니)/ 雪裡桃花片片飛(설리도화편편비, 눈 속에 복사꽃이 흩어져 날리네). ‘ 진리는 눈보라 몰아치는 현실 속에서 피는 꽃과 같은 마음으로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외가가 목은 이색 선생님과 토정 이지함 선생님 그리고 이산해 선생님 등을 배출한  한산 이씨 가문인 홍주 출신의 김좌진 장군님은 일제의 최정예 연대인 가노연대를 궤멸시키는 청산리대첩 후 1921년경 홍범도 장군님과 여러 독립군단의 대표들과 장기 항전을 결의하고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을 재편합니다.

    이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 의군은 기자 등으로 활동하며 1926년경 부흥원을 설립하고 월진회 활동을 하는 윤봉길 시인님을 19세쯤 되셨을 때부터 교류합니다.

    이흑룡 선생님을 통해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가 썼던 '조선혁명선언'의 배경과 단재 신채호 선생님과 운암 김성숙 선생님 등의 의열단 활동과 1924년 북경에서 발행된 문예지 " 황야 "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1929년 겨울 윤봉길 시인님께서는 1927년 2000만 조선동포의 개인당 평균 빚이 150원이란 것 등에 이어 1929년 광주학생반제항일의거 소식을 접하고 보다 확고한 반제대일항쟁를 계획하던 중 다시 찾아 온 이흑룡 선생님과 함께 1930년 3월경에 " 丈夫出家生不還 "의 글을 남기시고 김좌진 장군님을 만나러 떠납니다.

    하지만 윤봉길 시인님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셨다는 말을 듣고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 의군과 함께 큰 슬픔에 빠집니다.

    그동안 윤봉길 시인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윤봉길 시인님을 임강서원 선현분들의 가르침을 이은 인문학자이며 시인이며 예술가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상하이 의거가 있기 전까지 이처럼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군명) 의군에 대한 연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 홍주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지혜와 역량을 모으는 흑룡의 역할에 앞장서겠다는 조달호 대표님의 의기는 참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앞으로 윤봉길 시인님의 마지막 시도 낭송하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妻妻(처처)한 芳草(방초)여/

    明年(명년)에 春色(춘색)이 이르거던/

    王孫(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靑靑(청청)한 芳草여/

    明年에 春色이 이르거던/

    高麗江山(고려강산)에도 다녀가오/

    多情(다정)한 芳草여/

    今年(금년) 四月二十九日(4월29일)에/

    放砲一聲(방포일성)으로 盟誓(맹서)하세

    윤봉길 시인님의 誓詩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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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활동을 하시던 운암 김성숙 선생님께서 1924년 북경에서 창간한 " 황야 " 100주년에 대한 의미를 함께 되세기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지혜와 역량을 모아 주시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김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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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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