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공(世界大公)’을 주장한 통합의 지도자 안창호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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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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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은 정권 획득 이전에 나라의 번영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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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선국후당(先國後黨)’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민주당은 온 국민을 트라우마에 빠뜨린 2008년 광우병 사태, 2014년 세월호 비극을 악용하여 2016년 대한민국 체제를 탄핵했다.  

거짓과 공론(空論)은 개인과 민족을 분열시킬 수 있다. 흑백논리와 진영논리의 정쟁(政爭)이 만연한 한국 정계에 당파적 생각을 거부하고 원칙에 충실한 정치 지도자들의 출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될 것인가?

‘104세 철학자’ 김형석(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가 모든 면에서 일본보다 더 앞서고, 더 발전하고, 더 높아지면 된다. 그게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생 그리던 꿈이다”라고 했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일제강점기의 교육가요, 사상가요, 독립운동가다. 1878년 평남 강서군에서 안흥국과 제남 황씨 사이에 3남 1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학을 배우다가 신식학문에 눈을 떴고,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1895년에 상경,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갔다.

20세(1897)에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민족의 자각을 호소하는 명연설을 하여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쳤다. 25세(1902)에 이혜련과 결혼, 신학문 연마를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하면서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환난상구(患難相救) 등을 위해 ‘공립협회’를 조직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에 귀국, 1907년에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여 민족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1909)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1910년에 투옥되어 3개월간 옥고(獄苦)를 치른 후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로 시작하는 ‘거국가(去國歌)’를 쓰고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3년에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고,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의 내무총장·국무총리 대리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폭탄 사건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재투옥되었고, 1938년 병보석되어 향년 61세로 타계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도산은 개개인의 자각과 국제정세를 활용한 한민족의 독립이 지상과제였다. 그는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는 ‘애기애타(愛己愛他)’에서 출발해 민주국가를 세움으로 세계의 정의와 평화에 이르는 ‘세계대공(世界大公)’을 주장했다.

도산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에 귀착된다.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자기개조는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라고 갈파하며 민족운동에 파당을 초월한 방략을 제시한 도산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靑雲渡美急歸航(청운도미급귀항) 청운의 꿈을 꾸고 도미했으나, 급하게 귀국했고

四大情神願復疆(사대정신원복강) ‘4대 정신’을 전파시켜 국권회복을 기원했네

改造萬民庠序立(개조만민상서립) 민족을 개조시키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고

周遊天下思想匡(주유천하사상광) 세계를 돌아다니며 (독립) 사상을 바로 잡았네

知行合一尊師迹(지행합일존사적)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임은 스승의 공적이고

派黨超然啓示長(파당초연계시장) 당파를 초월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지금껏 살아있네

愛己愛他無境界(애기애타무경계) 자기 사랑과 남 사랑함은 세계에 그 경계가 없고

綿綿興士策邦康(면면흥사책방강) 면면히 이어진 흥사단은 나라의 편안함을 꾀하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ㅇ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님 2023년 3월 간도문화체험마을 강연 모습

 

아래는 e고려신문 편집의 견해입니다.

의열단 활동을 하시던 운암 김성숙 선생님께서 1924년 북경에서 창간한 " 황야 " 100주년에 대한 의미를 함께 되세기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지혜와 역량을 모아 주시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윤봉길 시인님은 임강서원 선현분들과 그 후예이신 안중근 대장군님과 안창호 선생님과 김동삼 선생님 등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월초대사님의 가르침을 받으신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운암 김성숙 선생님 그리고 운허 이학수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민족계몽운동과 반제항일 상하이 의거 등을 하신 분입니다.

광동 김창호는 광동중학교 1학년 부처님 오신날 이 자리에는 서로군정서 창설과 한족신보 기념비와 의열단 기념비와 " 황야 " 문학비 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난해 2023년 부처님 오신날까지는 그리 설파하였습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님 등의 가르침을 따른 윤봉길 시인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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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는 e고려신문 김창호의 한길문화운동 관련 내용입니다.

    필자는 조부님으로부터 임강서원 선현분들의 가르침을 받고 광동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월운 큰스님으로부터 월운 큰스님의 스승님이신 운허대사님의 스승님이신 월초대사님의 수제자이신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운암 김성숙 선생님의 반제항일삼일혁명 등에 대해 배운 뒤 군산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하여 독어독문학과 유럽의 대략적인 역사를 배운 뒤,

    월초대사님과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운암 김성숙 선생님 그리고 운허대사님이 인류사적인 측면에서 종교지도자로서 독일의 마틴루터나 프랑스의 칼빈 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하다는 것을 깨닳게 되어 독일 유학의 뜻을 접고 산티아고 순례길 뛰어 넘는 월초대사 삼일혁명 임강서원 순례길 만들기 운동을 기반으로 광릉숲유네스코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도 빌리브란트가 나치 척결과 동방정책을 펼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정치와 인사 행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통일과정을 보면 우리의 삼한일통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유럽의 몽마르뜨 언덕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찾으려 적금을 들기 보다 오히려 임강서원 선현분들과 월초대사님과 삼일혁명 등의 가르침이 서려 있는 우리의 역사 현장을 찾아 생산적이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작품을 쓰고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차분하게 생각해 보아 주세요.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 보면 우리가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유럽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청교도 혁명, 프랑스 혁명 등은 반역이고 쿠테타가 아닌지요?    저들 땅의 탐욕스런 절대군주로부터 지배받던 이들이 자유를 얻어 하느님의 사람들을 강탈하는 집단약탈로 바뀌어 아프리카 흑인들을 강제로 잡아다 노예로 삼고 매매하고 아편 등까지 팔아 세상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세태를 양산시키지 않았나요?

    윤봉길 시인님과 같은 홍주 출신의 만해 선생님께서 출가한 지 10년이 되던 1917년 겨울 백담사 오세암에서 견성한 뒤에 읊은 오도송(悟道頌)을 생각하면 윤봉길 시인님의 상하이 의거는 최고의 공연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남아가 가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중, 나그네 수심에 오래 잠긴 이가 몇이던가) / 一聲喝破三千界(일성갈파삼천계, 한 소리 질러 삼천 세계 깨뜨리니)/ 雪裡桃花片片飛(설리도화편편비, 눈 속에 복사꽃이 흩어져 날리네). ‘ 진리는 눈보라 몰아치는 현실 속에서 피는 꽃과 같은 마음으로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외가가 목은 이색 선생님과 토정 이지함 선생님 그리고 이산해 선생님 등을 배출한  한산 이씨 가문인 홍주 출신의 김좌진 장군님은 일제의 최정예 연대인 가노연대를 궤멸시키는 청산리대첩 후 1921년경 홍범도 장군님과 여러 독립군단의 대표들과 장기 항전을 결의하고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을 재편합니다.

    이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 의군은 기자 등으로 활동하며 1926년경 부흥원을 설립하고 월진회 활동을 하는 윤봉길 시인님을 19세쯤 되셨을 때부터 교류합니다.

    이흑룡 선생님을 통해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가 썼던 '조선혁명선언'의 배경과 단재 신채호 선생님과 운암 김성숙 선생님 등의 의열단 활동과 1924년 북경에서 발행된 문예지 " 황야 "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1929년 겨울 윤봉길 시인님께서는 1927년 2000만 조선동포의 개인당 평균 빚이 150원이란 것 등에 이어 1929년 광주학생반제항일의거 소식을 접하고 보다 확고한 반제대일항쟁를 계획하던 중 다시 찾아 온 이흑룡 선생님과 함께 1930년 3월경에 " 丈夫出家生不還 "의 글을 남기시고 김좌진 장군님을 만나러 떠납니다.

    하지만 윤봉길 시인님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셨다는 말을 듣고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 의군과 함께 큰 슬픔에 빠집니다.

    그동안 윤봉길 시인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윤봉길 시인님을 임강서원 선현분들의 가르침을 이은 인문학자이며 시인이며 예술가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상하이 의거가 있기 전까지 이처럼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군명) 의군에 대한 연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 홍주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지혜와 역량을 모으는 흑룡의 역할에 앞장서겠다는 조달호 대표님의 의기는 참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앞으로 윤봉길 시인님의 마지막 시도 낭송하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妻妻(처처)한 芳草(방초)여/

    明年(명년)에 春色(춘색)이 이르거던/

    王孫(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靑靑(청청)한 芳草여/

    明年에 春色이 이르거던/

    高麗江山(고려강산)에도 다녀가오/

    多情(다정)한 芳草여/

    今年(금년) 四月二十九日(4월29일)에/

    放砲一聲(방포일성)으로 盟誓(맹서)하세

    윤봉길 시인님의 誓詩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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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활동을 하시던 운암 김성숙 선생님께서 1924년 북경에서 창간한 " 황야 " 100주년에 대한 의미를 함께 되세기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지혜와 역량을 모아 주시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김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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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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