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가 한산 이씨 가문인 홍주 출신의 김좌진 장군님은 일제의 최정예 연대인 가노연대를 궤멸시키는 청산리대첩 후 1921년경 홍범도 장군님과 여러 독립군단의 대표들과 장기 항전을 결의하고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을 재편합니다.

이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 의군은 기자 등으로 활동하며 1926년경 부흥원을 설립하고 월진회 활동을 하는 윤봉길 시인님을 19세쯤 되셨을 때부터 교류합니다.

이흑룡 선생님을 통해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가 썼던 '조선혁명선언'의 배경과 단재 신채호 선생님과 운암 김성숙 선생님 등의 의열단 활동과 1924년 북경에서 발행된 문예지 " 황야 "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1929년 겨울 윤봉길 시인님께서는 1927년 2000만 조선동포의 개인당 평균 빚이 150원이란 것 등에 이어 1929년 광주학생반제항일의거 소식을 접하고 보다 확고한 반제대일항쟁를 계획하던 중 다시 찾아 온 이흑룡 선생님과 함께 1930년 3월경에 " 丈夫出家生不還 "의 글을 남기시고 김좌진 장군님을 만나러 떠납니다.

하지만 윤봉길 시인님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셨다는 말을 듣고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 의군과 함께 큰 슬픔에 빠집니다.

그동안 윤봉길 시인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윤봉길 시인님을 임강서원 선현분들의 가르침을 이은 인문학자이며 시인이며 예술가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상하이 의거가 있기 전까지 이처럼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군명) 의군에 대한 연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 홍주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지혜와 역량을 모으는 흑룡의 역할에 앞장서겠다는 조달호 대표님의 의기는 참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앞으로 윤봉길 시인님의 마지막 시도 낭송하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妻妻(처처)한 芳草(방초)여/

明年(명년)에 春色(춘색)이 이르거던/

王孫(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靑靑(청청)한 芳草여/

明年에 春色이 이르거던/

高麗江山(고려강산)에도 다녀가오/

多情(다정)한 芳草여/

今年(금년) 四月二十九日(4월29일)에/

放砲一聲(방포일성)으로 盟誓(맹서)하세

윤봉길 시인님의 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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