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유림(儒林)’ 김창숙 선생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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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유림(儒林)’ 김창숙 선생의 독립운동

  • 기자명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입력 2023.07.13 09:04  
  •  수정 2023.07.14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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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행복추구라는 정치의 요체를 망각한 채 좌우 진영 싸움으로 무위도식하고 있는 현 정치권을 보면서 구한말의 ‘가짜 선비들’을 생각한다. 국가 위기에 몸 바쳐야 하는 것은 선비들의 의무이자 대의이다. ‘선비 정신’은 행동할 때 빛난다. 유교 국가 조선이 망한 것도 지배층 유림이 먼저 부패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버리고 의를 쫓는다)를 끝까지 지켜 ‘3절(三節)’이라 불렸던 지사(志士)가 있다. 총독부 반대 방향으로 집을 지은 만해 한용운, 일제 치하에선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며 ‘꼿꼿세수’로 유명한 단재 신채호, 대의에 어긋나는 일과는 타협하지 않은 ‘마지막 선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심산은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7월 10일 경북 성주에서 김호림과 인동 장씨 사이에서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조 명유(明儒)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이다. 본관은 의성, 자는 문좌(文佐)이다.

2000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이 ‘심산상(心山賞)’을 받았다. 심산상을 받는 사람들은 심산 선생의 수유동 묘소에 가서 참배할 때 두 번 절을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김 추기경이 심산 묘소에서 절을 두 번 올리자 언론이 ‘가톨릭과 유교의 아름다운 만남’으로 대서특필한 적이 있다.

심산의 민족주의 정신은 유학의 ‘대의명분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27세의 심산은 상경하여 “나라 팔아먹은 오적(五賊)의 목을 베라!”는 내용의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고,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방론을 들고나오자 이를 성토한 죄로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선언서 작성 시에 심산은 모친의 병환으로 상경(上京)이 늦어져 결국 3.1 독립선언은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단체의 민족대표 33인만으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심산은 망국의 책임이 있는 유림이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못함을 치욕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7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

심산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의열단의 나석주를 지원하여 1926년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를 감행했다. 이 자금 출처 때문에 다시 한번 유림이 고초를 겪으니, 이른바 1927년의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심산은 ‘서로군정서’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 중 일경에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고, 14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대전 교도소에서 옥중투쟁과 악독한 고문 끝에 ‘벽옹(躄翁, 앉은뱅이 노인)’ 신세가 되었지만, 변호를 거절하고 항소를 포기했다.

광복 후 심산은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1946년 사이비 황도유학(皇道儒學)을 척결하고 성균관대학을 설립,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심산은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표상이었다. 네 차례의 투옥과 고문을 당했고, 두 아들까지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그는 1962년 5월, 83세로 타계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문집으로 <심산유고(心山遺稿)>가 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선각자이자 직언거사(直言居士)인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자.”라는 추모사를 했다.

실천적 지성으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분, 시대가 갈수록 광휘(光輝)가 나는 위인, 진정한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을 실천한 대유(大儒). 심산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嗚呼三節大儒賢(오호삼절대유현) 아! 일제강점기 절의 지킨 ‘삼절’로 큰 선비였고

光復籌謀半百年(광복주모반백년) 조국 광복을 도모한 계책으로 반백 년을 보냈네

異域風霜唯尺宅(이역풍상유척택) 이역만리에서 풍상 겪어 오직 한 자 집터만 있고

鄕關零落只寸田(향관영락지촌전) 고향 살림은 줄어들어 다만 좁은 밭만 남았네

受刑萬苦形身躄(수형만고형신벽) 온갖 괴로운 형벌을 받아 몸은 앉은뱅이가 되었고

問招千端血淚堅(문초천단혈루견) 수많은 문초를 받았지만, 피눈물로 견뎌냈네

打破舊儒新氣運(타파구유신기운) 시대에 뒤진 유교문화를 타파하여 기풍을 진작했고

始終一貫一靑天(시종일관일청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맑게 갠 하늘이었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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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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