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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시인문학평론가 생의 고별의 순간까지 글을 쓰고 싶은 사람

2부 17c~19c 노예제도와 신분제도가 폐지되어가면서 자본시장의 거점이 생성되었다.

17c 프랑스 대혁명(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은 프랑스의 혁명가들로 1792년 8월 10일에 왕을 체포해 음모를 시도했다는 명분으로 왕당파에 대한 대학살과 처형(화형)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감행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왕정복고 이후 파국으로 치달았고 시민계층은 벼락부자가 되었으며 신분 상승도 가능했다. 이는 신분제도의 단순한 폐지가 아닌 독립된 항거라 볼 수 있으며, 공화정(共和政-세습 군주나 선거로 뽑힌 군주 이외의 집단이 통치하는 정치 형태) 제정 군주정의 국가체계가 바뀌면서 불안한 정치사회와 봉건제도 절대 왕권에 대한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한 최초의 사회혁명이라 볼 수 있다. 1860년대 유럽과 미국 등 세계에서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극심한 변화가 일던 격동의 시대로, 민주주의 독립을 이루고자 한 것으로, 단순한 혁명이 아닌 왕과 귀족 영주를 향한 부르주아의 인권을 외치며 불평등사회를 바로잡고자 한 혁명으로 결국 새로운 시대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생성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17~18c 그로부터 19c에 이르기까지 카리브 해의 산도 밍고(현재 아이티 공화국)는 흑인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plantation- 선진국이나 다국적기업의 자본 및 기술과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이 결합하여 상품작물을 대규모로 단일 경작하는 농업 방식)의 농업으로 설탕, 커피, 코코아, 담배를 생산하는 식민지 시대로 당시 전 유럽의 수요의 절반 이상을 넘는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다. 1791년 8월 22일에 부두교의 고위성직자 투생 루베르튀 왕실의 권위가 강조된 시기로 프랑스는 18C 군주권이 강화하던 때였다. 혁명은 독일과 오스만 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17~19C 영국(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선언했고 미국의 노예제도 역시 폐지되어갔다. 1820년대 1830년대 후반에 걸쳐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미국에만 남아있던 노예제의 폐지로 인해 대서양 노예무역 붕괴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이 일어났고, 챔버스버그(Chambersburg), 리치먼드, 애틀랜타 같은 곳에서 대량의 인명 피해와 도시의 붕괴가 일어났다. 셔먼의 대행진은 아메리카가 경험한 첫 번째 전국적 전쟁으로 철, 철강, 전함과 같은 군사 기술에서 많은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고 초기에는 기관총의 발달과 빠른 배치가 붕괴를 가속했다. 내전이 끝나고 미국은 재건의 시기 백인 우월주의의 등장과 해방된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문제 등으로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외치면 노예제 폐지를 요구하던 혼란과 격동기의 시대였다.
이 무렵 조선(18C~19C)은 세도 가문들에 의한 변칙적 형태가 역이용됐고 조선(1860년대) 백성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 갔다.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인 양반계급이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와는 동떨어진 주자학에 매달려 500여 년 긴 세월 동안 장기 집권하면서 오로지 권력투쟁과 당파싸움에만 몰입되어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시대였다. 지금 우리 시대(물론 혁명도 마찬가지이다.)의 정치 경제 모습과 매우 닮아있지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18~19C(1860년대) 유럽과 미국 등 세계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혁명으로 세워진 거대한 제국의 시대로 '정의의 제국'이 되고자 하였으나, 끝내 '실패한 제국'으로 역사에 남게 되고 만 것이다.


*3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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