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서는 안 될 ‘경술국치(庚戌國恥)’와 매천 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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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서는 안 될 ‘경술국치(庚戌國恥)’와 매천 황현

  • 기자명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22.08.26 09:20   수정 2022.08.26 15:02
임진왜란 때 호남은 곡창지대로 조선과 일본 양국에게 똑같은 ‘필쟁지지(必爭之地)’였다. 이 곡창지대를 확보하지 못한 일본은 마침내 퇴각했고, 조선은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호남의 곡창지대를 사수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고 했다.

8월 29일은 ‘112주년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경술국치일’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는데, 굴욕의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새 정부 들어서고 대통령 지지도 하락 사태로 나라 안이 소란스럽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이 처연하다. 8월이 다가기 전에 매화 핀 구례에 살던 구한말 유학자 황현(黃玹, 1856~1910) 선생을 기억해야 한다.

정유재란(1597년) 때 ‘석주관 전투’를 이끌었던 왕득인의 후손인 왕석보(王錫輔)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황현이다. 황현의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그는 1855년(철종 6) 전남 광양에서 황시묵(黃時默)과 풍천 노씨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매천은 황희 정승과 의병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랐다. 이건창·김택영과 더불어 ‘한말삼재(韓末三才)’로 불렸던 인물이며, 시(詩)·서(書)·화(畵)에 더해 문(文)·사(史)에까지 능해 ‘오절(五絶)’이라고도 불렸다.

1888년에 생원시에서 장원 급제하였으나,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에 실망해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다. 특히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의 부패를 한탄하며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때 완성한 역사서가 47년간의 한말(韓末) 정세와 사회상을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과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오하기문(梧下記聞)’이다. 한시도 2,027수 남겼다.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사라졌다. 대한제국의 주권이 박탈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경술국치일’ 이후 연말까지 순국한 지사는 60여 명에 이른다. 1910년 9월 10일. 매천은 ‘대월헌(待月軒)’에서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았다. 독약을 마셔 목숨을 끊었으니 향년 56세였다.

맥수지탄(麥秀之嘆)의 심정을 담은 ‘절명시’ 4수 중 한 구절은 이랬다. “이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되기는 어렵기만 하다(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매천은 자결에 앞서 아래와 같은 유서를 남겼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하략).”

그러나 한 달 뒤인 10월 7일. 한·일 병탄에 공헌한 고관대작 76명이 총독부에 의해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각자 밝은 얼굴에 보이는 희열은 일장 가관이었다’(매일신보 1910년 10월 8일 자).

만해 한용운은 황현의 순국에 감동하여 1914년 추모시 ‘황매천(黃梅泉)’을 친필로 써서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의리로써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就義從容永報國취의종용영보국) 한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一暝萬古劫花新일명만고겁화신).”

매천은 유생이었으나, 나라를 위하여 공맹(孔孟)을 버릴 줄 아는 열린 지식인이었다. 포의(布衣)로,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겨레의 충성심과 민족의 자존을 일깨운 매천 선생의 불멸의 의(義)를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出仕灰心俠客親(출사회심협객친) 벼슬에 나가려는 마음을 돌려먹고 지사와 친했고

減加鄒魯史觀伸(감가추로사관신) 유교의 종주인 공맹을 뛰어넘는 역사관을 폈네

忠臣絶命驚朝士(충신절명경조사) 충신은 절명시를 지어 선비들을 놀라게 했지만

逆賊長生怒國人(역적장생노국인) 역적들은 오래 살아 백성들을 분노케 했네

切切遺詩開導衆(절절유시개도중) 성실하게 후세에 남긴 시들은 백성들을 개도했고

區區野錄啓蒙民(구구야록계몽민) 정성 다한 매천야록은 백성들을 계몽했네

槿花世界何時盛(근화세계하시성) 무궁화 세계(조국)는 어느 때 번성할 수 있을까

漢水呑聲北岳嚬(한수탄성북악빈) 한강물은 소리 죽이고 북악산은 찡그리고 있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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