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無道)한 정치’와 ‘40년 재상’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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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無道)한 정치’와 ‘40년 재상’ 이원익

  • 기자명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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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1.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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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법(法)·술(術)·세(勢)’ 개념은 동아시아 국가의 정치사상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중 ‘술(術)’은 왕이 신하를 은밀하게 통제하는 기술을 말한다. 국민의힘 초선의원들이 집단적인 ‘연판장 공격’으로 당 대표 경선 판을 ‘구맹주산(狗猛酒酸, 개가 사나우면 술이 시어진다)’으로 몰아가고 있다. 대통령이 특정 경선주자를 지지한다는 예단을 주는 것은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민주당이 1월 임시국회를 단독 소집했지만, ‘개점휴업’ 상태다. 이 기간에 외유를 떠난 국회의원은 지난 12일 기준 44명에 달하며, 이 중 민주당 의원이 절반이 넘는다. 결국 국회는 단군 이래 가장 큰 개인적 부정비리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이재명 방탄’ 도구로 전락했다. 나아가 민주당은 국민을 무시하는 ‘저질 코미디’를 연출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윤석열 정부는 ‘대선은 이겼지만 정권교체는 못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거대 야당의 ‘방탄 정치’에 가로막혀 있다. 3월 8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는 국민의힘이나 당 대표가 퇴출 위기에 있는 민주당 공히 ‘무도(無道)한 정치’에서 탈출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75년이 지났지만 광화문 광장에는 조선 왕조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만 서 있을 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웅들의 동상은 찾아볼 수 없다. 하루빨리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중흥시킨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이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야 한다.

우리 역사에는 여러 정권에 걸쳐 봉직한 인물이 있다. 고려의 이제현은 문하시중을 네 번 역임했다. 조선의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여섯 번의 영의정을 역임했다. 본관은 전주,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원익은 태종의 열두 째 아들인 익녕군 이치의 4대손이다. 1547년(명종2) 이억재와 동래 정씨 사이에 4남3녀 중 둘째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사마시에 합격한 5년 뒤인 23세 때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종9품)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임진왜란, 인조반정, 정묘호란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었다.

이원익은 관직생활 64년 중 40년을 재상으로 봉직한 ‘직업이 재상’인 인물이다. 또한 두 칸 초가집에 산 ‘초가집 정승’이자 청백리였다. 세종 때 황희, 숙종 때 허목과 더불어 임금으로부터 집을 하사받은 3인 중 한 명이다.

이원익은 남인으로 경기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세금을 감면했고, 붕당의 폐단 극복과 능력위주의 인사정책 등 국정전반에 걸친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안민제일(安民第一)’과 ‘민안국승(民安國勝)’의 신념을 일관되게 지켰다. 이런 이유로 선조는 “우리나라에는 오직 이원익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했으며, 정조는 “내가 이 사람을 재상으로 쓸 수 없어 아쉽다”라고 토로했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이원익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감 등을 간쟁했다. 이원익은 항상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변호하는 ‘신념과 의리’의 화신이었고, 자리를 지키려 정권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는 이순신을 복권시켰으며, 류성룡을 변호하다 사직했고,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처형과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다 귀양갔다. 인조반정 뒤 “광해군을 사사(賜死)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을 때도 이원익은 “광해군을 사사한다면 자신도 관직에 더는 있을 수 없다.”고 맞서 광해군의 목숨을 지켰다. 1634년(인조13) 정월. 87세로 숨을 거두었다.

‘지행상방 분복하비’(志行上方 分福下比, 뜻과 행실은 위를 향하고, 분수와 복은 아래에 견주어라)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한 명재상. 연속된 국란(國亂)의 고난을 국노(國老)의 영예로 승화시킨 ‘오리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一員宗室獻陵孫(일원종실헌릉손) 조선 종실의 일원으로 태종의 5대 자손이었고

東土竿頭我相存(동토간두아상존) 백척간두의 조선에는 ‘우리 재상’ 밖에 없다네

支廈虹梁淸白吏(지하홍양청백리) 큰집을 받드는 굽은 대들보 같은 청백리였고

屹波砥柱不憂軒(흘파지주불우헌) 거센 물결 버티는 돌기둥 같은 근심 없는 수레였네

再興九廟維新本(재흥구묘유신본) 사직을 다시 일으킨 유신의 본령이었고

歷仕三朝改革源(역사삼조개혁원) 3대 조정을 내리 섬긴 개혁의 근원이었네

四十均衡能燭秉(사십균형능촉병) 40년 동안 균형을 맞춰 촛불을 잘 밝혔으니

千秋萬歲不忘恩(천추만세불망은) 천만년 (‘국로’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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