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내용은 유투브 " 이만방송 "에서 e고려신문 편집인이 옮겨 왔습니다.  

이만방송 이래찬 대표님과 함께 포천시 농촌관광과 BOOK경기 문화관광을 통해 의로운 여행자분들께서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간절함에서 옮겨 왔습니다. 

임강서원 선현분들의 가르침을 실천한 광암 이벽 선생님과 사암 정약용 선생님 그리고 안창호 선생님과 안중근 대장군님 그리고 윤봉길 시인님 등을 추모하며 남양주시나 포천시 광릉숲 등에 한길문화마을역과 한길문화역사관(씨앗박물관 포함) 설치운동을 하는 것은

문흥대왕 김용춘 할아버지께서 제천지윤 하관지후 창의애민 홍익인간 재세이화 이민위천 위자안지 교육입국 인보상조 경천순민 민귀군경의 정신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신 가르침으로 하는 것입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당대 모든 과학기술의 산물이며 그를 통해 민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며 서로 돕도록 하고 교육입국 하여 삼한일통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김세영 선생님께서 서로군정서와 대한통의부 등의 독립군 지원 조직 복원과 강화를 고민하시던 때 윤봉길 시인님을 만나

이미 우리는 에디슨 보다도 공자와 맹자 등 보다도 나폴레옹 등 보다도 위대한 인물을 가졌는데 그 것을 빛내지 못해 이런 처지가 되었을 뿐이라고 하셨다 합니다.

송강 김홍기 할아버지께서는 윤봉길 시인님께서는 용춘 할아버지의 정원에서 춘추 할아버지와 문희 할머니 선조와 후예분들의 가르침을 되살려 실천한 최고의 언론인이고 예술가라 하셨습니다.

양주 농벗학당과 윤봉길 시인님의 상하이 의거로 손기정 선수께서 일장기를 묘목으로 가리는 기지로 이어지게 되고 민족혼을 살려 광복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인촌 김성수 선생님과 농벗학당 그리고 윤봉길 시인님 등과의 흔적이 남았다면 간도참변 그 이상의 일들을 겪지 않았을까요?

의로운 사람을 외롭게 해서는 안된다는 인촌 김성수 선생님의 " 덕필유린 (德必有隣) " 정신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는 광동 김창호는 1997년경 인촌 선생님의 어느 후손분을 만났을 때 양주 봉양에 있었던 농벗학당의 역사를 조명해 기리면 혹 동아일보 가문에 닥칠 위기를 극복하고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덕필유린(德必有隣)  덕 德 - 어떤 의미로 살펴야 할까요?  

 

덕필유린(德必有隣)를 인용해 글을 쓰는 많은 분들 중에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고가(故家)에는 덕필유린(德必有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를 인용하며  " 덕필유린(德必有隣) "과 관련된 글을 쓰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있게한 인촌 김성수 선생님의 덕필유린(德必有隣) 덕 德의 의미는 그분들이 쓴 것이 맞는 것일까요?

 

우리 역사 기록에서 덕 德에 대한 의미를 깊이 고찰할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지증왕과 관련 된 기록입니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 新羅’로 바꾸었는데 이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기인 한 것입니다.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의 덕 德에 대한 의미는 지증왕의 정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증왕은 순장제도를 금지하고, 소로 농사를 짓는 우경법으로 농업생산성을 높였습니다. 석빙고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해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서라벌 동쪽에 시장을 열어 상업을 장려했습니다.  나라의 군현을 정비해 처음으로 군주를 파견해 백성들을 직접 통치하며 "덕업일신 망라사방 (德業日新 網羅四方)"를 실천하였습니다.   이사부 장군을 파견해 당시 우산국으로 불리던 울릉도를 복속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국리민복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지증왕대 신라는 토착 신앙에 의해 나라와 사회가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율령이 반포되고 불교가 공인된 것은 이후 법흥왕대입니다.  그리고  유학이 들어온 것은 그 이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덕 德의 의미에서 이 당시는 전통적인 가치와 지증왕의 사고가 결합하였을 것이며 불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면 자비와 살생금지라는 개념이 가미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증왕은 당시나 지금의 일반과는 다른 고도의 지적능력을 갖추었음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후는 고려 시대 의성김씨 시조(始祖) 김석(金錫)은 고려 초 무신(戊申) 정권시대에서 벗어나 널리 인재를 등용하는 문치(文治)시대로의 전환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국방과 백성들의 구휼에 공을 세워 경종 임금 때 식읍 300호를 하사 받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며 제 8대 현종 때 덕유후(德儒侯)의 시호(諡號)를 받기도 하였다라는 기록입니다.    고려에서의 덕유德儒는 의 義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례로 인촌 김성수 선생님의 선조 되시는 문흥대왕(文興大王) 김용춘 할아버지께서는 문흥(文興)은 창의(倡義)융성([隆盛)으로 후손들에게 교육하였습니다.    그래서 광산김씨의 시조로 후손되는 김흥광 (金興光) 선생님과 후손분들께서는 민귀군경(民貴君輕) 경천순민(敬天順民)를 실천하며 고려 태조대왕과 함께 하며 신라 新羅 덕유 德儒의 가치를 계승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님의 중시조 되는 분은 호남의 거유로 통하는 하서 김인후 선생님입니다.   또한 하서 김인후 선생님의 스승은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 사셨다는 문경공 김안국 선생님으로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에 있던 임강서원과 이천의 설봉서원 등에 배향되셨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인촌 김성수 선생님께서 사시던 시대에 인촌 김성수 선생님을 비롯한 미추대왕님과 문흥대왕 김용춘 할아버지 후손분들의 덕필유린(德必有隣)에서 덕 德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인문학을 다시 정립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의 예에서처럼 마음과 눈이 닫혀 있으면 여건이 되어도 할 수 없지만 마음이 열려 있어 함께 보면 해 낼 수 있다는 증거를 만들기 위함에 추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登白雲峯

(등백운봉) : 백운봉에 올라 - 李成桂 장군님 詩

引手攀蘿上碧峰
(인수반라상벽봉)
손을 끌고 담쟁이를 잡고 푸른 봉우리에 올르니,

一庵高臥白雲中
(일암고와백운중)
한 암자가 흰 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구나.

若將眼界爲吾土
(약장안계위오토)
만약 장래에 눈앞에 뵈는 땅이 내 땅이 된다면,

楚越江南豈不容
(초월강남기불용)
초나라든 월나라든 강남땅을 어찌 마다 하겠는가.

위의 시는 이성계 장군님께서 백운봉을 오른 뒤에
쓰셨다는 시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삼각산의 백운봉을 해석하는데...  김창호는 포천시 이동면 백운산의 백운봉을 오른 뒤에 쓰신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도선대사님께서 포천시 이동면 백운산자락에 흑룡사를 세우시고 대정을 열어 사해를 평정할 인재를 키우시며 아래와 같은 시를 남기셨습니다.

이성계 장군님은 도선대사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무학대사님을 만났고, 위와 같은 시로 자신의 뜻을
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도선대사님의 답산가(踏山歌)에는

"송성(松城)이 떨어진 뒤에 어느 곳으로 향할 것인가?
삼동(三冬)에는 해 뜨는 평양(平壤)이 있도다.
후대의 현사(賢士)가 대정(大井)을 열매
한강(漢江)의 어룡(魚龍)이 사해(四海)에 통하도다."

라 하였습니다.

우리 깊이있게 감상해 보면 어떨까요?  성경에는 하늘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것은 하늘의 성령은 서양의 역사와만 함께 하셨을까요?

하느님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과 함께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하는 의롭고 좋은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이 글을 읽고 이만방송을 시청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서는 언제나 의롭게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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