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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커우 공원[虹口公園]의 승리 장부 출가 생 불환(丈夫出家生不還)의 윤봉길 의사 5광릉숲 문화예술 네이버밴드에 소개
김영미시인문학평론가  |  광릉숲 문화예술 네이버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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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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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시인문학평론가 생의 고별의 순간까지 글을 쓰고 싶은 사람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의 승리 장부 출가 생 불환(丈夫出家生不還)의 윤봉길 의사.

5부. 출가 생 불환(丈夫出家生不還)의 25세의 청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의 거사는 민족 자주독립의 승리를 이끌었다.


조선의 내외적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상황은 결국 국민을 지켜내지 못한 약소국(弱小國)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 우리는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나온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논거하고 있다. 이는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 경제적.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 차별받지 않는다. 조선시대 삼정과 세도 가문 삼정에 의한 정치가 아닌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가 인정되지 아는 형태로서 효력을 가진다. 이에 어떠한 특권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즉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지는 것으로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곧 자주독립이다. 자주독립은 인권이 그 토대 위에 선 태평성대(太平聖代: 어진 임금이 잘 다스리어 태평한 세상이나 시대.)를 이루는 것으로 신분이나 종교 성별 나이 인종 배움에 따르지 않는 인권이며 참정권이다. 분열과 분쟁 좌파와 우파 당파싸움(붕당정치. 세도 정치.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선과 세계의 정세는 민주주의를 향한, 즉 자주독립을 향한 몸부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공리공론을 떠나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ㆍ객관적 학문 태도. 조선 시대 실학파의 학문에 큰 영향을 줌.)를 토대로 한 올바른 역사관 고취가 필요한 시점에 온 것이다. 흔히 나라를 조국이라 한다. 조국은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세 살배기 아이도 부모의 이름은 안다. 초등학생인 아이들도 제 물건 하나라도 억울하게 빼기면 빼기지 않으려 고군분투한다. 필자는 사학자도 고고학자도 아니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많은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고 검증하고자 했다. 자료를 검토하는 데 있어 몇 가지 사실을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아래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많이 보아온 사진일 것이다.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의 거사 후 체포되는 모습을 다룬 사진이다. 사진처럼 윤 의사가 체포될 당시의 사진은 아니라고 한다. 체포될 당시 주위의 군중들에 의해 주먹, 군화, 몽둥이로 그의 몸은 난타 됐다. 가진 몰매와 짓밟힘으로 인해 윤 의사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두 번째로 도시락 폭탄은 잘못 보도된 뉴스라는 것이었다. 도시락 폭탄은 홍커우 공원의 거사 후 군중 속에 떨어진 도시락을 기사화했다고 한다. (아래의 사진 참조)


윤 의사에 대한 취조 내용 등을 바탕으로 1932년 7월 일본 내무성이 작성한 `상하이 윤봉길 폭탄 사건 전말' 자료에 따르면 물통 폭탄은 성인 남성의 손바닥만한 크기로 타원형에 가죽끈이 달려있어 어깨에 멜 수 있게 돼 있다고 한다. 하얀 헝겊으로 폭탄의 전체 표면을 덮어 물통과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고 병마개를 손으로 돌려 안에 있는 끈을 잡아당겨 던지면 바로 폭발된다고 한다. 세 번째 상하이 의거가 김구 선생에 의해 이뤄졌다. 실상은 윤 의사가 자진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음모론이 거론되어 평전으로 저술한 책들이 난무해 있다. 이 때문에 윤 의사의 업적이 과소평가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약소국(弱小國)의 국민도 무지몽매(無知矇昧: 세상 물정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사리에도 어두운 것을 일컫는 말.)한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다시 말해 역사에 있어 전기와 위인은 존재하되 평전은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것으로 적확(的確)한 사실에 토대를 둔 평전이 올바른 역사가 될 것이라 사려 된다. 윤 의사는 선각자이며 당대의 지식인이었으며 농민 운동가이자 뛰어난 문인이었다. 상하이 의거 전 그는 어머니께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해 이 길을 택했다’는 내용이다.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조선왕조는 1783년부터 조선에서 비밀리에 전파되기 시작한 천주교로 인해 양반에 대한 신분제도의 위기와 천주교도들의 하느님을 숭배하면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고 모든 백성의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의 전통적 왕권정치와 충효 사상에 위배되었기에 조선 정부는 천주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추후 서양으로부터 들어오는 문물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다름 아닌 쇄국정책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유림과 정부 관리들의 압력과 당시 권력투쟁의 권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주의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원군이 권력을 완전하게 잡기 전인 1865년 프랑스와 영국과의 삼자동맹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프랑스 신부들과의 만남을 타진했을 정도로 개혁적인 면모를 일견 보이기도 했다. 조선은 지정학상으로 일본과 중국 가운데 위치한 나라로 이웃의 일본은 일찍 개화하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화혼양제和魂洋才('화혼'이란 일본의 전통적 정신을, '양재'란 서양의 기술을 말한다. 근대화 시기 일본의 구호이다)를 실천하며 근대화의 길로 들어선 반면에 우리는 위정척사의 망상에서 허우적대며 혼란만 증폭시켜 갈 뿐이었다. 조선시대의 통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性理學: 인간 존재의 본질ㆍ구조ㆍ존재 근거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이론체계로 우주 자연과 인간 만물의 생성 변화를 설명한 이론. 성리학은 주자가 그 이론체계를 완성했기에 ‘주자학(朱子學)’이라 하기도 함.)은 형이상학적인 이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형이상학을 천시하여 그에 속하는 과학 기술의 발달을 억제하는 사회적인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17~19c에 이르기까지 서양은 합리주의에 근거한 실증론이 태동하기 전까지는 형이상학을 지향하는 세계를 이상향으로 보았지만,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합리적인 사유가 태동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근대 산업사회를 지향해 갈 기틀을 만들어갔다. 서양에서는 일찍이 애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부의 원천은 노동이며,
부의 증진은 노동생산력의 개선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생산의 기초를 분업에 두었다. 분업과 이에 수반하는 기계의 채용을 위해 자본의 축적이 필요하며, 자유경쟁에 의한 자본축적을 꾀하는 것이 국부 증진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세계의 주도적 세력이 되는 서구열강은 현실을 분석하고 산업혁명을 일으킨 이후 유럽에서는 중상주의의 시대가 열리면서 세계를 지배하기 전 자본과 국력을 충실히 축적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탄탄히 다져갔으며 산업자본가들 역시 자본의 크기를 늘려나가며 국외시장에까지 영향을 가했다. 시민혁명의 성공은 권력의 중심의 추가 절대왕정에서 부르주아로 통칭하는 대자본가들에게 넘어갔음을 일찍부터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지도계층들은 식민지를 개척하여 식민지역의 자원을 철저히 수탈하며 서양의 나라들이 국부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나갈 때 당파싸움에만 급급해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이며 굶주림에 시달려 갔다.
조선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서양 문물의 우수성을 눈여겨봤었더라면 임진왜란 이후에 반짝했던 실학이 성리학에 결국 패퇴하여 활력을 잃었던 것도 중요한 도약의 기회를 잃은 것이다.
조선은 인류의 발전 보다 아니 나라인 조선의 발전보다 자신들의 이 속을 채우기에 더 바빴다는 결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약소국(弱小國)의 국민이라서 나라를 피탈 당했던 걸까?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자주독립은 없었을 것이며, 열일 곱의 꽃다운 나이에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지 않았을 것이며 저 천국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겠다고 부르짖는 안 의사는 없었을 것이며 도시락 폭탄을 투하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가만 보면 백성이 무지하다지만, 가르치고 시대를 이끌고 계몽해야 할 시대의 선각자라는 아니 당대 지도자라는 지식층 사대부들은 다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위인지학(爲人之學: 남을 위하여 학문을 함. 학문의 목적이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리사욕이 난무하고 부정부패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이 나라가 그래도 지탱해 나갈 힘의 원천엔 우리의 깊은 내면에 뿌리 둔 자주독립과 나라의 안위와 안보를 위한 선진(先進)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나라 사랑이 오늘에 우리를 민주주의 나라로 자주독립의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윤 의사의 거사 당시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이 있던 시기였다.
윤 의사가 거사를 치를 조선의 (상하이 1919년 4월 11일에 수립된 임시정부) 당시 상황은 안창호 (등)의 주도로 시대적 요청에 따라 그해 9월에 삼권분립에 입각한 민국(民國)이 시작되는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외교활동을 초점으로 독립전쟁에 주력했지만, 안타깝게도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 독립에 전념하였으나 서구열강의 냉대와 비협조, 일제의 추격으로 인해 국내 조직이 와해하였던 상황이었다.
1930년 3월 장부 출가 생 불환 ("丈夫出家生不環"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집에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윤 의사의 후커우 공원의 거사는 장제스( 중국 정치가 중화민국 총통) “중국군 3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고려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말했다. “중국의 100만 군인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칭송했다. 그의 나이 고작 23세였다. 이 거사는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만나 한국의 독립운동을 논의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 영. 중 삼국 정상 회담이 열렸다. 카이로 회담은 중국 입장에서는 근대 외교 역사상 처음으로 자국이 참여한 정상 회담이자 미국, 영국과 동등한 자격에서 참여함으로써 아편전쟁 이래 오욕의 역사를 청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두었다 볼 수 있다.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 측의 미국(루스벨트)ㆍ영국(처칠)ㆍ중국(장제스) 일본의 패망에 앞서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한 회담 결과 3국 수뇌 정상들은 이 회담에서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국제적으로 처음 결의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오늘날 비서구 국가로 중국이 유일하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하나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카이로 회담 덕분이다. 이제 우리는 윤 의사의 정신을 받들어 오늘을 빛낼 선진(先進)들의 정신을 고취해 나갈 역사관과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사명이다. 부모가 없는 가족은 없다 하물며 뿌리가 없는 민족이 있을 수 있으랴! 역사는 지난날 우리의 거울과 경계인 만큼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민족은 살아남을 수 없다. 자세히 보라 서구 열방과 강대국들은 자본과 국방력만을 높이지 않았다. 인재를 양성하고 국가의 뿌리인 국민에게 나라의 역사를 고취하고 심어주었다. 그것이 오늘의 강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게 한 이유였다는 것을 말이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네포티즘
(Nepotism)이 아닌 특정 다수의 특정 계층의 나라가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는 것. 학문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인격을 수양하여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을 실천하고 이루어가야 할 때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당대의 지도자나 세도 가문이나 양반 사대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또다시 강대국의 먹잇감이 되어 나라를 피탈 당하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이 글을 마감하며 올바른 역사와 문화를 위해 선각자가 되어 윤봉길 문학과 예술 그리고 시인 윤봉길 리더십 & 이형관 언론학교 문화강좌 등을 이끌어가는 김창호(고려신문) 대표의 의로운 길에 덕필유린(德必有鄰: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 깃들기를 바라며 5부작에 이르러 많은 것을 배우며 의로운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김창호 대표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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