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버김영미시인문학평론가
김영미시인문학평론가 생의 고별의 순간까지 글을 쓰고 싶은 사람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의 승리 장부 출가 생 불환(丈夫出家生不還)의 윤봉길 의사

4부 삼정의 문란과 백성의 고통- 세도정치와 붕당정치로 인해 내외적인 압박으로부터 조선은 백성을 지키지 못했다.


조선 후기 지방 곳곳에는 농촌 시장으로서 장시가 발달하게 되었고, 그 토대로써 운송 교통업이 이 시기에 이르러 크게 발달하게 되면서 조선 후기사회는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그 잉여생산물이 처분되면서 자본의 집적이 가능해졌다. 한편 선대제(先貸制- 예전에, 유럽이나 조선에서 상인이 수공업자에게 미리 원료와 기구를 대 주고 물건을 만들게 한 뒤에 삯을 치르고 그 물건을 도맡아 팔던 제도.) 상인이 독립된 수공업자들에게 원료나 도구, 임금 등을 지불하면서 물품을 생산시키는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상업자본이 생산과정에 투입되면서 부자상인 이 생겨나면서 신분세탁도 가능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한 하층민과 노역자가 줄어들었고 삼정은(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 제도) 문란했다.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나라는 균열이 가해졌다. 17c 붕당정치(朋黨政治- 과거에 관료들이 서로 파벌을 이루어 정권을 다투던 일. 당쟁(黨爭)이라고도 한다.)에 있어 지배계층인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의 근거를 삼으려 했으나, 19c 세도 가문
(국왕에게 위임 받은 특정인과 그 추종 세력, 즉 소수의 외척 가문들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 독과점적 정치 형태. 19c초~19c 중엽.)들은 정권의 장악과 유지의 중요한 기반으로 국왕과 왕실의 권위에 두었으나, 18c 군주 권이 강화되었던 상황이 19세기에 이르러
(18∼19세기) 중앙정부의 각종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여러 문제가 대두되면서 19c 조선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형태를 사회적으론 평등주의를 문화적으론 합리주의를 경제적으론 자본주의 형태를 띤 시대였으나, 국가 재정(19c 조선 왕조) 수입으로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특히 군정((軍政)은 원래의 취지는 군역을 부담하는 이들 중 실제로
군 복무를 하는 사람(번상병 番上兵)의 급여를, 실제 복무를 하지 않는 사람들(보인保人)에게서 수취하여 지급하는 것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공명첩(등)으로 양반이 증가하고, 도망친 농민들이 많아지면서 국방세를 걷으려 해도 세금을 낼 대상이 줄어든 상황에서 조선 후기의 과세 대상은 크게 감소했다. 조선은 경제계 시장권의 확대로 인한 군역을 지지 않는 16세~60세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군포(軍布)를 내게 했다. 당시 조선왕조가 당면했던 재정위기는 17c 대동법의 시행으로 어느 정도 대처 되어 가는듯하였으나, 전근대적 재정이 갖는 한계로 인해 재정위기는 계속해서 발생했고 18c 조선왕조는 국가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군역제도와 관련된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균역법 시행을 논의하고 전개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 균역법은 영조(28년 1752년)에 시행된 양역의 폐단으로 양인 층의 피역 저항이 강화되어 가던 상황으로 양인 층을 안정시키고 국가재정을 확충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제정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변동의 여파에 잇따른 부세 제도가 총액제 수취 방법이 변동되어 감에 따라 부세 제도 자체인 삼정의 문란을 더 부채질한 꼴이 되었다.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고자 백성의 저항은 강화되어가고 조선왕조는 국가의 존립과 직결되는 문제로 대두되었다. 1623년 서인들의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대북 세력이 몰락하면서, 조선왕조의 대외정책은 반전되어갔다.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인조5)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된 듯하였으나,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이 무렵 서학(천주교)의 전래와 동학사상과 기독교 사상이 전파되었고 조선왕조의 종묘사직과 신분제가 무너질까 전전긍긍하며 오로지 권력투쟁과 당파싸움에만 몰입되어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인 양반계급은 500여 년 긴 세월 동안 장기집권(주자학)하면서 국력을 강화하고 새 문물과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받아들이기보다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 신분제에 눈이 멀었던 조선왕조는 환곡제의 운영에 있어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1860년대 조선 백성의 삶은 궁핍하며 더욱 공고해졌고 민란은 계속해 일어났다. 실로 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인한 삼정의 문란과 민생 파탄과 당파싸움(등)의 결과로 1910년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된 격동의 시대였다. 결국 조선 후기 환곡의 진휼 기능은 국가재정을 보충하는 것으로 변질하면서 국력은 쇠잔해질 수밖에 없었고, 아시아 국가 중 일본이 재빠르게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가 되면서 서양 열강과 어깨를 견줄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조선은 일제 식민 침탈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약소국가라서 약소국가의 백성이어서 침략을 당했던 게 아니다. 경술국치·국권 피탈·일제 강점·일제 병탄으로도 불리는 이 치욕은 대원군 집정 이후(한일합병이란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국권을 상실) 조선은 쇄국정책만을 고수하다 대원군의 배일친러 정책을 표방하자, 1876년 일제의 강압적인 외교로 인해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의 제공을 강요당했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벌당했다. 러일전쟁을 눈앞에 둔 1903년 12월, 일제는 영·미의 지지 하에 한국의 식민지화 방침을 확정 짓는 ‘대한방침(對韓方針)’을 결의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일제는 러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조선은 러일전쟁의 우세한 전황 속에서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Portsmouth)강화조약의 결과 한국 안에 러시아 세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힘들어지자 영·미 군사력을 등에 업고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 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받아 놓은 상황에서 영국·청·미국·독일 등 주한 외국공관들도 철수하고 말았다.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을 협박했고 1876년(고종 13) 일제의 강압적인 외교에 눌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군사·경제·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고 일제는 매국노들을 매수해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외교권은 완전히 박탈되었고, 국권을 강탈당했
다. 조선을 지탱했던 신분제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이 결국 절대 권력과 장기 집권이 합작하여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은 내외적인 압박으로부터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조선의 백성을 지켜내지 못한 비극의 역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을 던지게 맞을까? 김구에 의해 의거가 시작된 것이 맞을까? 마지막 5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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