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가야지역의 무덤에서는 많은 철기 유물들과 ‘철정(鐵錠)’이라 부르는 쇳덩이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영남지역의 앞선 제철 능력이 신라 국력 증강의 배경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신라가 통일의 주인공이 된 것은 철기민족 가락(駕洛)의 선진 철기문화 영향이 컸다.

7월 3일은 포항제철소의 준공일이다. 신라 개국 이후 2000년 만인 1973년 ‘영일만의 개벽’이 있었다. 이 개벽은 포항제철의 용광로 속에서 이루어졌다. 상무·기술민족의 원형질을 잃어버리고 농경민족으로 살아온 대한민국의 민족융성을 위한 거보(巨步)였다. 쇠가 불의 사용과 함께 인류문명을 바꾸어 놓았듯이, 포스코는 대한민국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지향적 통찰력’과 박태준 회장의 ‘제철보국 정신’이 만들어낸 ‘제철 신화’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최근 최정우 회장 등 포스코 경영진이 “더 이상 포스코는 국민기업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포스코 정체성’을 부정하는 홍보를 하고 있는데, 지하에 계신 박태준 회장이 이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포스코의 혼’은 면면히 계승발전 돼야 한다. 포스코는 단순한 기업이 아니고, 민족의 피 값으로 건설된 민족기업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의 영웅인 김유신 장군을 “풀 베는 아이와 가축을 기르는 아이까지도 그를 알고 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철의 왕국 가야계로 철제무기로 삼한을 일통한 김유신(金庾信, 595~673) 장군은 어쩌면 포스코의 선구자가 아니었을까.

김유신은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의 12대 손으로 사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김유신은 595년(진평왕17)에 김서현(金舒玄)과 만명부인(萬明夫人) 사이에서 만노군(萬弩郡, 진천)에서 태어났다.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나가 있을 때였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그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하였다. 17세에 고구려·백제·말갈이 신라의 강토를 침범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보고 외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中嶽, 단석산)의 석굴로 들어가 수련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가야계 김유신을 중용한 것은 인재등용에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는 ‘포용의 인사’였다. 김유신은 백전백승의 명장이요, 탁월한 전략가였다.

김인문은 《화랑세기》에서 이렇게 평했다. “김유신은 가야지종(加耶之宗, 가야의 우두머리)이고 신국지웅(新國之雄, 신라의 영웅)이다. 삼한을 통합해 우리 동방을 바로 잡고 혁혁한 공을 세워 이름을 남기니 해와 달과 더불어 견준다.”

676년 신라는 나당전쟁의 승리로 삼한일통을 완수하는 동시에 자주권을 회복하였다. 삼국 통일기에 신라가 당시 세계 최강국인 당(唐)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것은 김유신의 자주국방 의지와 신라인의 기백 덕분이었다.

한반도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지배하려 한 당에 담대히 맞서 ‘유연한 외교’와 ‘결연한 전쟁’ 투 트랙으로 한국사를 창조한 김유신의 ‘통일 리더십’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日月之雄駕洛鄕(일월지웅가락향) 해와 달 같은 영웅(김유신)은 김수로왕의 후손이고

獨修中嶽劍書彰(독수중악검서창) 홀로 단석산에 들어가 수련해서 문무가 드러났네

親朋斷指全能相(친붕단지전능상) 친붕(김춘추)과 단지동맹으로 전능한 재상 되었고

士卒同心不敗王(사졸동심불패장) 군사들과 마음을 같이 하여 불패의 명장이 되었네

三國和平尤赳赳(삼국화평우규규) 삼한을 화평하게 하여 더욱 용맹한 나라 이루었고

大唐逐出更堂堂(대당축출갱당당) 당나라 군을 축출하여 다시 당당한 나라 만들었네

花郞氣魄成功事(화랑기백성공사) 화랑의 기백은 성공(삼한일통)의 단서가 되었고

興武春秋永世望(흥무춘추영세망) 흥무대왕은 오랜 세월 영원토록 우러름을 받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