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문턱을 갓 넘었지만, 선진화와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이 많다. 무엇보다도 선진국의 본진(本陣)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저항이 따르더라도 강도 높은 ‘경제개혁’을 해야 한다.

우리 역사상 경제개혁의 쌍두마차는 고구려 을파소의 진대법(賑貸法)과 조선 김육의 대동법(大同法)을 들 수 있다. 대동법을 완성한 조선 최고의 경제개혁가 김육(金堉, 1580~1658)을 고찰해 보자.

김육은 인조·효종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로, 조선조 인물 가운데 백성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대동법이 시행될 당시 “백성들은 밭에서 춤을 추고, 개들은 아전을 향해 짖지 않았다”는 말이 이를 입증한다.

김육의 좌우명은 ‘만물을 사랑하여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뜻의 ‘애물제인(愛物濟人)’의 정신이다. 이에 기초한 김육의 정치경제 사상은 ‘이식위천’(以食爲天,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과 ‘안민익국’(安民益國,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에 이롭다)의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었다.

김육은 성균관 태학생(太學生) 시절인 광해군 때 집권 대북(大北) 영수(정인홍)에 맞섰다가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는 34세(1613년, 광해군5) 때 경기도 가평의 잠곡(潛谷, 청평면)에 들어가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하고, 10년 동안 농사짓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꾸렸다.

김육은 만약 백성과 관리와 임금(나라)의 이해관계가 달랐을 경우 먼저 ‘백성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민위귀 사직차지 군위경)’는 맹자의 ‘민귀군경(民貴君輕)’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한다.

인조반정(1623, 광해군15)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등용된 김육은 백성의 가난과 고통을 잊지 않았다. 효종 즉위년(1649)에 우의정에 제수되자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겠다면 출사(出仕, 벼슬에 나감)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1654년 6월에 75세의 김육은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했다.

대동법은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에서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첫째는, 토지 소유와 상관없이 가구단위로 부과하던 공물을 토지소유 면적을 기준으로 부과하도록 바꾼 것이다.

둘째는, 지방 토산물을 거두어들이는 조세 방식을 쌀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바꾼 것이다. 이것은 현물의 납부에 따른 ‘방납(防納)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주었다.

대동법은 가난한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 부자의 세금을 늘린, ‘부자 증세’라고 할 수 있다. 대동법 실시 뒤 수공업과 상업 발달이 촉진됐고, 상공인층이 성장했다. 대동법으로 조선 사회는 되살아났다. 대동법이 아니었다면 조선의 종말이 100년은 일찍 왔을 것이다.

김육의 ‘민본사상’과 ‘개혁사상’은 잠곡(가평군 청평) 10년 농부의 힘든 삶을 통해 체득되었다. 추경호 새 정부 초대 경제사령탑이 잠곡(潛谷, 김육의 호) 같은 경제개혁을 추진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필자의 자작(自作) 한시 ‘추모잠곡김육선생’(追慕潛谷金堉先生)’을 소개한다.

초년십재와산림(初年十載臥山林) (조정에 도가 없어) 초년 10년 동안 산림에 은거했고

개혁행정사사임(改革行程四使任) 민생개혁을 위해 네 차례나 중국사행 임무를 맡았네

이식위천방국본(以食爲天邦國本) (백성) 먹이는 것을 하늘로 삼는 게 국가의 근본이고

간난제도정민심(艱難濟度定民心) 가난을 구원하여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네

대동일법전사무(大同一法田舍舞) 대동법을 시행하자 (백성들이) 밭과 집에서 춤췄고

전토회생소작음(全土回生小作吟) 나라의 모든 땅이 소생해서 소작인들이 노래했네

우순풍조승상학(雨順風調丞相學)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드는 게 재상의 철학이었으니

천추만세개허흠(千秋萬世豈虛欽) 영구한 세월 공경함이 어찌 헛된 일일까?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