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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 인간은 카타르시스[catharsis]를 통해 성장하고 외연에서 내연으로 상처를 느끼며 치유하는 영적 정화의 존재
김영미 시인 문학평론가  |  광릉숲 문화예술 네이버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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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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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시인문학평론가 김영미 시인 문학평론가 생의 고별의 순간까지 글을 쓰고 싶은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 인간은 카타르시스
[catharsis]를 통해 성장하고 외연에서 내연으로 상처를 느끼며 치유하는 영적 정화의 존재이다.

어떤 작품이 아름답고 멋지며 훌륭한 작품인가?' '어떤 기준이 작품을 아름답다, 멋지다,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가? '예술은 어떤 기능을 해야 진정한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근본적 물음에 대한 답을 읽어낼 수 있는 고전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말한 카타르시스[catharsis]는 단순한 슬픔 비극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학술산업이 확장되면서 고학력과 정보의 홍수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어둡고 춥고 외면되고 소외된 곳을 돌아보지 않는다. 고학력과 학술 시대 수많은 문학 석. 박사가 배출되면서 인간 내면의 심연을 울리는 글은 배타(排他)되고 철학적, 사회학적, 석. 박사가 쓴 글이 더 인정받는 시대에 와 있다. 물론 배운 것이 많으면 내공이 많기에 당연히 더 많은 것을 표현해 낼 수 있다. 제도권에 학계에 속한 학생들은 학자의 자격을 취득하고 문학 석. 박사를 지향하며 문창과서 배운 글의 틀을 잘 활용해 제도권 안에서 학연. 지연의 토대가 되어 자칭 우리만의 세상을 이룬다. 학문적으로 지식적으로 배운 언어의 표현이 정형화된 틀 속해 갇혀 잘 써진 글이라 하고 있다. 석. 박사 강연에 내놓은 것은 이런 글은 보지도 말고 쓰지도 마시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그것을 배설하고 수용해야 하는가? 무엇을 지적하기보다 구분이 될 수 있는 경계의 틀을 안내하고 모호성을 적확[切實]하게 설명해야 하는 게 맞지 아는가! 화자가 삶을 통해 도학적으로 체득한 글을 넋두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효용론(독자가 갖는 감흥)을 극대화해내는 내적인 상징에 있어 표현론 효용론 존재론이 외재적 감상과 내재적 감상이 이루어질 때 효용론은 더 극대화되며, 은유와 상징을 통한 문학이 지니는 고유한 언어적 글쓰기를 표현 할 수 있는 하나의 글. 하나의 텍스트[Texte]가 완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외연(denotation)에서 내연으로 일생을 배우며 익히며 느끼며 교감하며 슬픔과 아픔 기쁨 주검과 삶 그리움 사랑 연민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존재의 가치에 있어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진솔한 것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아픔을 아픔으로 거기에 더 나아가 아픔을 승화한 기쁨과 환희로 생과 사의 주검의 귀로에서 바람으로 나무로 흙으로 목련으로 매화로 개나리로 바다로 시상을 무한하게 펼쳐낼 수 있는 표현의 장치를 갖는 플롯(plot)이다. 문화예술에 있어 인간은 철학적 존재이며 수단이나 목적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공허와 극강[極強]의 허무를 다시 찾고 느끼며 삶의 방향과 생명을 얻는 내면의 치유인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얻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글이 삶의 넋두리이며 핑계와 자기감정의 잘못이라면 작가의 요용소치[要用所致]를 헤아리는 혜안을 갖지 못한 것이며 글에 대한 심미(審美) 이상(理想)을 갖지 못한 것이며, 염세주의[厭世主義]에 빠진 것일 뿐이다. 화자로서 예술에 있어 천착해 온 외길 인생에서 체화(體化)되진 못한 글에 대한 정체성이 결여된 것일 뿐, 한 인간의 전 생애(삶.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관념을 재조명해야 한다.

인간은 외연(connotation)에서 내연(denotation)으로 일생을 배우며 익히며 느끼며 교감하며 슬픔과 아픔 기쁨 주검과 삶 그리움 사랑 연민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존재의 가치에 있어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진솔한 것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아픔을 아픔으로 거기에 더 나아가 아픔을 승화한 기쁨과 환희로 생과 사의 주검의 귀로에서 바람으로 나무로 흙으로 목련으로 매화로 개나리로 바다로 시상을 무한하게 펼쳐낼 수 있는 표현의 장치(plot)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공허와 극강[極強]의 허무를 다시 찾고 삶의 방향과 생명을 얻는 내면의 치유인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얻는 것이다. 그런 글이야말로 생명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무지한 독자를 혼돈[混沌]속으로 내몰지 말라. 혼돈주[混沌酒]에 취하게 하지 말라.

‘어떤 기준으로 작품이 아름답다, 멋지다, 훌륭하다 예술의 기능을 하는가?' 이런 근본적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리스인이 남긴 유산 중 시와 예술에 관한 유일무이한 문헌이다. 비극을 통한 아름다움의 원리를 설명한 시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비극'을 중심으로 예술의 본성과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지 학문적인 지식적 전통에 따른 논리학과 그에 관련된 저술 범주론, 명제론, 분석론, 토포스론, 소피스트식 논박을 실려는 게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학(모든 학문)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치밀한 분석과 경험적 사고를 바탕으로 논리학에서 자연학, 형이상학, 생물학, 윤리학, 심리학, 연설 술(수사학), 문예비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여기에 이론적 학문형이상학은 화자가 삶을 통해 평생을 도학적으로 체득한 언어를 암시하는 음률과 가락을 가진 고유한 정서의 메타포[metaphor]이다. 인간의 슬픔 기쁨 아픔 인생의 가치와 행복, 그것을 노래해내는 화자의 메타포[metaphor]는 시의 사유에 있어 진정한 진(眞), 선(善), 미(美)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시의 텍스트[Text]에 있어 각기 생성되고 변화되고 세계와 불변의 세계를 다루는 자연학 (등)의 저술과 형이상학에 해당한다. 시에 있어 시학은 단순한 글의 모방 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글 속에 화자를 투영해 그 속에 담아내고 나를 표현해 내는 것이다. 시의 메타포[metaphor]에 있어 카타르시스[catharsis]
는 독자가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현학적이고 난해한 글이 되어선 안 된다. 독자가 외면하는 글 독자가 보지 않는 글은 곧 죽은 글이다. 시의 사유에 있어 독자가 읽고 느끼는 시의 화자의 플롯(plot)을 통해 독자는 슬픔과 눈물 아픔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갖는다. 그런 화자의 표현을 낡은 것이며 버려야 하는 것이며 넋두리며 화자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핑계와 변명이라 말한다.

시의 사유에 있어 텍스트[Text]는 읽기를 통해 해석되고 존재한다. 이를 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시의 사유에 있어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시의 반영론과 효용론 작품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시의 메타포[metaphor]에 있어 반영론 작품론이 존재하는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되는 이유는 카타르시스[catharsis]이다.

우리는 외연적 삶의 고통에서 내연적 삶의 고통을 시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내면의 고통을 치유해 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하마르티아 (hamartanein-비극적 결함) ‘잘못을 저지르다’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비극에 있어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함이 있는 존재이며 단점을 가지는 존재라 말한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면서 실수하는 존재인 동시에 슬픔을 가지는 존재이면서 그 슬픔에서 헤어나고자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삶의 어려움과 고통 아픔을 어느 순간 극복하기를 원하며 극복해 나가는 존재다.

우리는 지금 단절되고 상실되고 실종된 시대에 있다. 그 극복에 있어 문창과를 통해 문학 석. 박사 학위를 통해 기득권자의 세력을 만들어 같은 학연 지연 제자라는 이유로 등단을 시켜주며 신춘문예에 당선되게도 한다. 우리들만의 세상 자칭 모 학술회 모 문학지 모 문단사로 글을 정형화 해 독자를 향한 울림보다 저자와 학연 지연에 의한 더 큰 자본주의의 냄새를 풍겨내고 있다. 문학에 자본주의 표상을 기득권인양 석학으로 학문적으로 지식적으로 배우고 습득해 학문적으로 얻어낸 언어를 학술지 문예지로 창출해 내고 있다. 이는 한국문학에 있어 대립과 갈등을 불러오게 할 뿐이다.

오케스트라 연주에 있어 바이올린도 콘트라베이스도 피아노도 있어야 하고 지휘자도 바순도 있어야 한다. 어느 한 악기가 음역이 낮다고 저음만 낸다고 악기가 필요 없다. 라고 오케스트라에 있어 빠져도 되는 쓸모없는 악기는 아니란 것이다. 시는 연역적, 귀납적, 논리, 추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며 무엇을 체득해야 하는가! 화자가 고뇌하며 번민하며 삶의 아픔과 어려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어 표현해 낸 것은 넋두리가 아니다. 글을 형상화 하기위한 화자의 여러 표현 요소로 작품을 구성하고 배열하는 플롯(plot)이다. 야누스는 “문학 수용자의 능동적인 참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라고 했다. 독자와 함께 호흡하며 울고 웃으며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낄 수 있는 글이 진정한 시이며 생명을 가진 글이 아니라면, 누가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가! 정형화된 틀로 우리들만의 글을 존귀하고 귀한 글로 잘 쓴 글로만 인정한다면, 과연 이 시대 누가 글을 쓰며 누가 작가라 시인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읽기와 쓰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물과 공기처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작가가 평생을 다해 살아오며 아파하며 호흡하며 깨달으며 체득한 것을 글에 담아 투영하는 것은 당연한 카타르시스[catharsis]의 이치이다. 언어는 창작이며 언어의 표현을 통해 작품을 구축하고 굶주림과 예술 사물에 대한 관념과 관조[觀照]와 가치 문화 글쓰기는 시인이 사물에 대해 가지는 표현과 응시이다.
비 오는 날을 보고 관망[觀望]하는 화자의 태도는 인간적인 파문과 인간적인 연민과 아름다운 미의 추구를 형상화하여 글을 쓴 것이다. 어찌 넋두리이며 작품이 아니라 말 할 수 없다.

작가의 삶이 투영된 글이 독자로부터 진정한 호응을 가질 때 시의 효용론 반영론 존재론과 작품론 가치론을 가지는 진정한 글이 될 수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는 에이도스[eidos]를 갖는 것이다. 에이도스[eidos]가 구체적 현상으로 감각되는 사물의 형상(形象)을 가리키는 데 비해 이데아[Idea]는 육안이 아닌 마음(내면)의 눈으로 통찰되는 사물의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를 가리킨다. 곧 이데아[Idea]는 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적 사물의 원형으로 모든 존재의 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항구적[恒久的]이며 초월적이며 실재를 뜻하는 것이다.

*요용소치[要用所致] 필요가 있어서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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