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동 국무총리께서 태어난 집 앞, 노제에 참여한 사람들 
 

기자수첩/ 이한동 전 국무총리님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 5월 8일 세상을 떠난 이한동(1934~2021) 전 국무총리는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포천 청성초등학교(1947년)를 거쳐 경복고등학교(1953년)를 졸업했다. 그 후 서울대 법대에 진학 대학 재학 중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그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났지만 아버지를 대신하여 장남으로 생계를 맡기도 했다. 학창시절 내내 우수한 성적으로, 가난한 환경에도 비관하지 않고 과외선생 등으로 학업을 계속했으며 또한 그의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주위 친척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졸업 할 수 있었다.

그를 생전에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인께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 민심을 수습하고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등 국가가 어려운 때 어려운 일을 해내신 분”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화양동 건국대병원에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각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는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뒤 기자들에게 “이 전 총리께서 현직에 계실 때 제가 외교통상부 차관으로 근무했다”며 “모든 일을 시원시원하게 처리하시면서도 올바르게 하셨다. 공직자로서, 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등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발인식은 5월 11일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었고 발인식 후 고인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는 노제를 위해 경기 포천시 명산리 생가로 향했으며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이 전 총리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날 발인식을 지켜본 고향 사람들은 “고인은 6선 의원, 내무장관 등을 지낸 보수진영의 상징적 인물이었어요. 그리고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서는 총리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우리 고향의 큰 인물이었는데 안타깝네요”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이한동 전 총리는 통 큰 정치를 지향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요즘처럼 여야가 대치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정치 상황에 비춰보면 그의 통 큰 정치가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고인은 선이 굵은 정치를 했으며 포용의 상징으로 후배 정치인들에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5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이 박태준 국무총리 후임에 이한동 자민련 총재를 공식 지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총재의 고향인 포천군 군내면 명산리231 생가 주변 주민들은 “이제 드디어 그동안 이 지역 주민들이 주장해왔던 중부권 대권론이 성사되기 위한 수순이 아니냐”며 “지역에서 ‘큰 인물’이 탄생했다”고 고무된 반응을 보였는데 이런 분위기는 생전 고인이 보여준 대화와 타협 그리고 포용의 정치를 고향 주민들이 알고 있었기에 생긴 것이라는 게 당시의 분위기였다. 그래서 발인식이 끝난 후 어느 정치인은 “옛날 대포(큰 술잔으로 마시는 술) 잡수시던 걸 생각하면 10년은 더 사셨어야 하는데…"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어린 시절 남달리 몸집이 컸고 과묵하면서도 활달한 성격을 가진 고인은 동네 ‘골목대장’으로 유명했으며 조부모와 엄격한 아버지 슬하에서 어른을 공경하는 예절을 배우고 ‘수재’라 일컬어 질만큼 공부도 뛰어났으며 훗날 6선 의원과 총리를 지내면서도 언제나 겸양한 생활로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은 고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별세 소식은 북경기 지역 주민들에게 큰 슬픔이 되고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 현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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