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義人)을 의인답게 대접하라

 

                          김  중  위

 

가축들 중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주인을 위험에서 구해 준 얘기가 심심치 않게 전해지고 있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의 경우도 그렇다. 그곳에 가면 ‘의견비’와 ‘의견동상’이 있다. 

어떤 시골 분이 장에 간 김에 술을 과하게 마셨는지, 집으로 오는 길에 그만 개울가 잔디밭에서 누워

 잠이 들어 버렸다. 때마침 무슨 원인인지도 모를 불이 일어나 잔디를 태우면서 주인을 덮치려 혀를

 널름거리고 있었다. 주인과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따라다니던 개가 이 광경을 보고, 냅다 개울로

 뛰어들어 제 몸을 물에 적신 후에 불길이 일고 있는 잔디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한 번으로 안 되니까,

두 번 세 번 수백 번씩이나 개울을 드나들면서 주인이 누워 자는 주변을 모두 적시자 불길이 잦아들었다. 개는 지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한참 후에야 술에서 깨어난 주인이 전후사정을 알아차리고 쓰러진 

개를 끌어안고 통곡해 마지않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주인은 큰 화를 그 개로 하여 면한 것에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개를 묻어주고 

자신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무덤가에 꽂아 기념해 놓았다. 몇 해가 지난 후, 그 개의 무덤을 찾아가

 본 주인은 자신이 꽂아놓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나무를

 오수(獒樹) 즉 ‘개 나무’라 지은 것이, 오수면 오수리라는 마을 이름으로 기념되어 오늘까지 전해

 온다고 한다.

이처럼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고 죽은 의로운 가축 얘기로는 고양이도 있다.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고양이 석상’에 얽힌 얘기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임금이다. 그 벌을 

받아서였던가! 몸의 어느 한 구석도 성한 데가 없이 종기로 뒤덮여 밤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떻게 기도라도 해서 종기를 치료해 볼까? 하고 찾아간 곳이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

어느 날 법당으로 기도하러 들어가는 순간! 난 데 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무엄하게도 세조의 

옷자락을 붙든다. 주위 사람들이 쫓아도 달아나지 않고 한사코 붙들고 있는 것을 보고 세조가 괴이하게 

여겨 명령을 한다. “법당 안을 뒤져 보라!” 병사들이 뒤져본 즉 과연! 자객 한 명이 칼을 품고 불상이 

놓여 있는 탁자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이었다. 이때 세조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보답으로 상원사에 

전답을 내려주었다. 이 전답을 일컬어 묘답(猫沓) 묘전(猫田) 즉 ‘고양이 논’과 ‘고양이 밭’이라 한다.

상원사에서는 그 고양이를 기리기 위해 고양이 석상 한 쌍을 조각하여 기념비로 삼고 있다. 지금은

 마모가 심해 설명 없이는 금방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우리네 생활 속에는 의로운 가축으로 소도 등장한다. 한때 〈워낭소리〉라는 다큐멘트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면서 크게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영화를 통해, 말 못하는 소라 할지라도 

그 주인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사람 못지않게 듬뿍 묻어 나오는 것을 본다. 주인 또한 비록 재산가치가

 높은 가축이지만, 재산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늙어 갈수록 의지하고 싶은 정겨운 한 식구로 알고 

살뜰히 보살피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애라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이려니 하는 느낌을 가져본다.

개와 고양이와 소가 가축으로서는 인간과 가장 밀접하면서도 서로가 감정적으로도 교감할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존재여서 의로운 소에 얽힌 얘기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의우(義牛)에 관한 얘기로는 

‘의리와 예절에 넘치는 책 마을’을 꿈꾸는 열화당(悅話堂)의 만년 열혈청년, ‘이기웅(李起雄)’ 사장이 쓴 

《의리를 지킨 소이야기》(2007, 열화당)에서 간추려 본다.

 

인조 8년(1630)에 선산부사 조찬한(趙纘韓)이 의리 있는 소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듣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자 그의 손자인 조구상(趙龜祥)이라는 사람이 조선조 숙종 30년(1704)에 의우(義牛)에 얽힌 

이야기를 화공을 시켜 그린 여덟 폭 그림에 담아 목판본으로 남겨 놓았다. 그 그림의 서문을 보면 

이렇다(義牛圖 序文).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문수점(文殊店, 지금의 경북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에 사는 농부 김기년(金起年)이 암소를 데리고 밭을 갈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호랑이가 나타나 소를 향해 덮쳤다. 농부는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쟁기를 들고 호랑이를 쫓았다. 그러자 호랑이는 덮친 소를 내 팽개치고 농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농부가 호랑이를 당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순간에 암소가 쏜살같이 뛰어들어 호랑이를

 들이 받았다. 호랑이는 허리와 등짝 곳곳에 소뿔에 받쳐 피를 철철 흘리면서 도망가다가 얼마 못가 

죽었다. 농부는 호랑이에게 물린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소를 몰고 집으로 왔으나 상처가 깊어 죽게 되었다. 농부는 식구들을 앉혀놓고 유언을 한다. “내가 죽더라도 이 소를 팔지 말고 늙어 죽더라도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내 무덤 곁에 소를 장사 지내다오”

농부가 앓아 누워있을 때 까지만 해도 논에 나가 열심히 일하던 소가 농부가 죽자 미친 듯이 울부짖고 

펄쩍펄쩍 뛰면서 물과 여물을 일절 끊은 채 사흘 낮밤을 안절부절 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의우총(義牛塚)’이 생겼다.

 

이 얘기를 다 들은 성주부사 조찬한은 이런 내용으로 극찬하고 있다. “숫소도 아닌 암소가 죽기를 

각오하고 호랑이에 달려들어 주인을 살려냈으니, 이 얼마나 매서운 충성스러움과 의로움인가! 

충성스러움과 의로움은 타고난 천성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덕성일 뿐 동물의 본성은

 아니다. 이는 소가 아닌 사람의 처신에 가깝다.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이와 함께 그 의우를 기리기 위해 ‘의우총’에 비(碑)까지 세워주었다. 1994년 선산군에서는 퇴락한 

봉분에 가토(加土)를 해주고 의우도의 그림과 똑같은 그림 8폭을 화강암에 새겨 묘지 뒤편에 전시하고 

있다. 경북 민속자료 제106호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충의로운 가축으로 어찌 개나 소나 고양이만 있을까? 주인에게 층성하기로는 말(馬) 또한 다른 가축에

 뒤지지 않는다. 중국 단동(丹東)에는 ‘러일전쟁기념비’로 일본이 세운 말의 순국비도 있고, 심양에 

가면 귀마촌(歸馬村)이라는 마을도 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죽은 주인을 등에 싣고 수백리길 고향을 

찾아 왔다는 말에 얽힌 고사에서 생긴 마을 이름이다. 이처럼 귀마촌이나 오수리라는 이름과 함께 

‘의견동상’을 세우고, 임금을 살렸다고 하여 ‘고양이 석상’을 쌍으로 건립하고, 의우의 설화를 ‘

의우총’과 비석 그리고 그림으로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짐승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랴 하는 

심정으로 후세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오래된 고전 《맹자(孟子)》 첫머리에서도 나라에 이롭게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묻는 ‘양혜왕’에게, 

맹자는 “인의(仁義)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利)를 말하는가”고 되묻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논어》에서도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의(義)다. 바람직한 인간의 행동기준은 ‘의’에 있을 

뿐임을 누누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견리사의(見利思義)하고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 하였다. 

즉 ‘이’를 보거든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운 것을 보면 그 위태로움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 걸 각오를

 하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자는 그런 사람을 ‘완전한 인격체’ 즉 성인(成人)이라 하였다.

남의 위태로움을 보고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잃거나 상해(傷害) 입은 사람을 나라가 돌보기

 위해 우리는 〈의사상자(義死傷者)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라는 것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법만 만들어 놓으면 무엇하나! 의사상자들에 대한 예우가 ‘떼 법’으로 정한 대상자만도 못한 

예우에 그치고 있는 것을! 의인을 의인답게 예우해야 의가 살아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농암 김중위/.4선의원. 前 환경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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