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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이 무슨 권력이란 말인가 / 김중위농암 김중위, 4선의원, 前 환경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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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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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족이 무슨 권력이란 말인가

 

                                               김  중  위

 

 참담한 심정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손자들을 본다오래 전에는 그의 맏손자가 뇌물수수로 국영기업체의 사장직에서 불명예 퇴직을 하더니이제는 그 둘째 손자가 또 방위산업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차마 쓰고 싶지 않은 내용이지만애국지사의 유족 그것도 김구 선생의 손자로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명예인지도 모른 채 줄줄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에 아픈 상처로 남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대통령의 아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국영기업체의 사장직을 맡게 된 연유나 보훈처장직에 발탁될 수 있었던 사연도 모두가 백범의 손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다말하자면 나라가 백범에 대한 존경심과 보상으로 그 후손들에게 은혜를 베푼 자리가 아니던가 말이다그렇다면 그들 손자들은 그 자랑스러운 조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직책을 수행했어야 했다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마치 백범의 유족이라는 것이 무슨 큰 권력이나 되는 듯이 거드름을 피면서 뇌물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김양 전 보훈처장의 경우는 통상의 뇌물죄와는 사뭇 다른 내용의 것이다어쩌다 가까운 친구의 편의를 봐주다가 받은 용돈이 문제가 된 경우와는 다르다는 얘기다그는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도되고 있으니 말이다자신의 집 주소에 항공우주산업 컨설팅업체를 설립하여 이 법인 명의로 해외 방위산업 업체와 고문계약을 체결하고 자문료와 강연료로 14억을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해상작전헬기 도입이 자신의 로비로 성공하면 또다시 수십억을 받기로 해외방산업체와 계약을 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듣기가 여간 씁쓸하지가 않다다른 사람이라면 법에 따라 처벌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르다온 평생을 독립을 위해 몸 바쳤던 나라의 대 은인이요 스승으로도 존경받는 백범의 손자이기에 남다른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백범은 자신의 일지에서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렇다안준생은 왜놈을 따라 본국에 돌아와 왜적 이등박방(伊藤博邦)에게 부친 의사(義士)의 죄를 사하고 남 총독을 애비라 칭하였다.(남 총독은 19361942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郞)이다(도진순).

이 일지의 내용은 안중근 의사의 아들에 관한 얘기다. ‘안준생은 안 의사의 둘째 아들이다안 의사가 신부가 되기를 그 토록이나 바랐던 큰아들 안분도는 8살에 죽고몸이 약해 신부가 되기에 적절치 않다고 여겼던 안준생은 근근이 살아백범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저질렀던 것으로 보인다얼마나 서운하고 노여웠으면 왜 준생을 교수형에 처하지 않았는가!”하고 절규 하였을까그것은 백범이 안중근 의사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앞서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차라리 준생이 죽었으면 안 의사의 명예에 흠집은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안 의사나 백범과 같은 비범한 인물들에게나 어울리는 생각이다왜정 치하에서 안중근 의사의 아들로 살아남기가 그리 쉬운 일이었겠는가일제의 눈길에서 피해보려고 했겠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블라디보스토크로 중국 상해로 쫓겨 다니는 요시찰 속의 가시밭길만이 그들의 삶의 현장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준생이 이등박문의 아들 앞에 꿇어 앉아 아버지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 수밖에 없었던 장면(1942)도 따지고 보면 일제가 연출한 하나의 연극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연유였던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 가족 일행은 해방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상해에 눌러 앉아 있었다전후 사정을 보면 안준생이 악기점과 약국도 하고 교향악 단원으로 바이올리니스트로 연주생활도 하면서 자가용 자동차나 아들의 자전거도 사 준 것을 보면 상당한 정도의 재산이 있어 상해를 떠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준생의 유일한 아들 안웅호(安雄浩)씨의 설명에 의하면, 1949년 재산 처분을 위해 아버지 준생만 상해에 남고 20살 누나인 선호와 12살 여동생 연호는 미국으로 떠났고 자신과 어머니 정옥녀씨 둘이서만 서울로 왔다고 한다상해에 남아 있던 아버지 준생은 뒷날 재산을 처분하고 홍콩을 거쳐 서울로 왔다그리고 곧바로 이들 가족은 6.25를 만났다부산 피란 중에 준생씨는 죽고 그 아들 즉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혈손 안웅호씨는 1952년 미국유학길에 올랐다그리고 작고할 때까지 미국에서 유명한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그 어머니 정옥녀는 92년 한국에서 작고했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은 백범 김구 선생의 유족처럼 정부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은 것도 없이 스스로를 들어내지도 않은 채 묵묵히 살고 있다무엇 때문일까안 의사의 아들 준생의 변절 때문일까변절을 했다면 안중근 의사의 아들 준생이 한 것이지 손자가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안 의사의 유일한 유족이면서도 죽을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살고 있었던 안웅호씨의 얘기를 들어 보자.

기자(김병무)가 그의 생존 시에 물었다안 의사의 손자이면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라고 말이다그의 대답은 이랬다. “조부는 내 어깨에 달린 날개와 같다내가 무슨 일을 하건 조부의 손길은 나의 곁에 있다나는 조부의 영혼 안에서 태어났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나는 내 재능을 필요한 데 쓸 수 있도록 해준 것 자체로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어머니는 내가 하는 일을 한국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조부님의 이미지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그렇게 하면 그것이 오히려 항상 실재해 있는 조부님의 위대성을 손상시키게 되며그 영예를 내가 차지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나는 진심으로 일생동안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이 조부를 통해서였다고 느끼고 또 믿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작은 아들로부터 들은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작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죽으라고 그래라!” 이를 두고 어느 언론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是母是子!” 즉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말이다장한 일을 한 아들이 행여나 항소라도 해서 스스로의 명예를 훼손시킬까 두려운 마음으로 내뱉은 한마디였다어머니의 말이 바로 아들의 마음과 같았던 것이다안웅호의 회견문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

유족이라는 존재가 결코 권력이나 권세가 될 수 없다그런데 요즈음의 세태를 보면 유족이라는 것이 마치 무슨 큰 권력이거나 권세나 되는 것처럼 위세를 떨고 있으니 눈꼴 사납다.

유림(儒林)독립운동과 심산(心山김창숙(金昌淑)

 

파리장서운동은 유림독립운동의 결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을미의병으로부터 시작된 유림들의 독립자강운동은 3.1 운동을 거치면서 더욱 구체적이면서 국제화되기에 다다른 것을 본다. 3.1 독립선언서에 유림의 대표들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그들은 제각각 자신이 처해있는 자리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영남에서의 김창숙과 곽종석호서지방에서의 김복한이 독자적으로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훗날 하나로 묶는 작업이 이루어 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호남에서의 유림의 거두 전우의 유림독립운동의 참여거부는 다른 측면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어찌 되었거나 유림독립운동의 한 복판에는 심산 김창숙이 있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매천 황현이 나라가 망하는데 어느 누구 배운 사람으로서 이를 서러워하며 죽는 사람 하나 없다면 그것이 말이나 되는 것이냐!” 하면서 자결했던 심정과 같은 심정으로 심산은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하고 유림의 대표로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을사5을 참()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부터 시작된 심산의 애국독립운동은 해방되는 날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위정척사에 앞장섰던 유림들이 의병활동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는 운동이 세칭 파리장서운동이다필자는 이 파리장서운동이야 말로 제2의 3.1 운동이라고 평가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3.1 운동의 불씨가 꺼져가려는 즈음에 전국의 유림들이 다시 한 번 불씨를 당겼다고 보아지기 때문이다상해임시정부도 심산이 상해에 당도한 뒤에 세워졌는데우연은 아니라 할 것이다.

여하튼 심산의 일생을 보면 백절불굴의 정신 그 자체였고 애국지사 중의 애국지사였다유림(儒林)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다는 이유로 대구형무소에서 14년의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는 과정에 그는 극심한 고문에 그만 앉은뱅이가 되었다그래서 그는 자신의 호를 앉은뱅이 즉 벽옹(躄翁)이라고 지으면서도 자신을 한 번도 훼절하지 않았다.

일본의 강압에 자신의 뜻을 굽힌 많은 훼절자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라고 분개하면서 재판과정에서는 변호사도 필요 없다고 거절한 분이었다일본 법률의 재판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는 단 한 번도 간수(看守)들에게 목례 한 적이 없었다그로 인해 숱한 모욕을 당했지만그때마다 더욱 더 의연하게 그들을 꾸짖으면서 고매한 자신의 인격을 지켜 냈다그의 큰아들과 둘째아들도 독립운동에 잃었다그래서 어떤 이는 심산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과 만해 한용운 선생, 3분을 합해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3()’로 추앙하자는 사람도 있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심산선생은 반공과 반독재와 민주화를 위해 누구보다도 올곧은 발걸음으로 일관하였다신생 대한민국의 먼 장래를 위해 스스로 창립한 성균관대학교의 초대 총장자리도 자유당정권에 의해 빼앗기면서도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오직 나라의 통일과 반독재를 위한 포효(咆哮)로 만년(晩年)을 불태웠을 뿐이다어떤 정당 참여도 어떤 관직의 유혹도 뿌리쳤다해방된 조국으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을 수여 받았다돌아가셨을 때에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참으로 청사에 길이 남을 자랑스러운 애국지사였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심산 김창숙 선생과 우리 집안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심산은 의성 김씨 문중의 문정공파 동강(東岡김우옹(金宇顒)의 13세 종손으로 경북 성주의 사도실 마을에서 태어났다그러나 혈맥으로 보면 그의 부친 김호림(金頀林)이 의성 김씨 집성촌인 내 고향 경북 봉화 해저마을의 입향조인 개암(開巖김우굉(金宇宏동강의 형)의 후손으로 태어났다개암의 후손으로 태어나 그 동생인 동강의 종손으로 양자를 갔다는 얘기다.

그의 부친 김호림이 해저에서 성주 사도실로 양자를 가게 된 경위를 보면 참으로 놀랄 일이다양부 될 사람이 해저에 와서 몇 달을 눈여겨보면서 고르고 골라 데려간 아들이 바로 김호림이고 그 김호림의 아들로 심산이 태어났기 때문이다그러기에 기록상으로 보면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한 문중사람으로 사도실에서 보다는 해저사람이 월등히 많은 것을 보면 혈맥이 보여준 끈끈한 정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내 증조부(順永)님의 역할도 한몫 했으리라 짐작이 된다심산은 독립청원서 초안을 가지고 비밀리에 해저마을에 들어섰다가까운 친척(鴻基)집에 묵으면서 그 초안을 놓고 회의를 했다이 자리에서 내 증조부는 이미 60대 중반의 마을 어른의 입장에서 이건 젊은이 보다는 마을 어른들이 앞장 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앞장 서 서명운동을 주도 하였다이유가 있었다증조부님의 생각으로는 이번 한 번의 청원으로 독립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이번에는 늙은이들이 앞장서고 젊은이들은 후일을 기약하자는 뜻이었다.

이 일이 발각되어 증조부께서는 안동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끌려가 3개월의 옥살이를 하였다그 사이에 증조부는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하셨을까안 봐도 알만한 일이다그 옥살이 중에 안질(眼疾)이 걸려 종래에는 한 쪽 눈을 잃으셨다이때의 일이 역사적으로는 제1차 유림독립운동으로 기록된 일로 해저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된데 이어 곧바로 제2차 유림운동이 일어나 또 한 번의 소용돌이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심산이 상해로 떠났다가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해저 마을에 와서 독립자금을 얻어 간 것이 왜경(倭警)에 들통이 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심산의 입장으로는 본인의 생가인 성주는 이미 왜경에 노출된 요주의(要注意마을이지만 해저는 그래도 그보다는 덜 주목받는 마을이었기에 당신의 부친 생가(生家)쪽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지 않았나 싶다.    

 

농암 김중위 /.4선의원. 前 환경부장관.

 

 

 

 
 
 
 
 
삼산 사랑방 cafe.daum.net/samsan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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