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외교와 결연한 전쟁의 ‘투트랙’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5-12-07 11:35
  • 승인 2015.12.07 11:35
  • 호수 1127
  • 55면


 

통일 대업은 신라의 리더십에서 배워라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가장 약한 나라 신라를 가장 강한 나라로 이끌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주역이다.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 42?~ 199)의 12대손이다. 김유신은 사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追尊)되었다. 왕보다 높은 대우를 받게 됨과 동시에 후손들은 왕족으로 대우 받았다. 왕을 하지도 않고도 대왕 칭호를 받은 사람은 김유신이 유일하다.

김유신은 595년(진평왕17)에 가야계 출신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과 어머니 만명부인(萬明夫人) 아래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나가 있을 때였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다. 그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하였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화랑도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또한 이에서 생겼다”고 했다. 김대문이 ≪화랑세기≫에서 거론한 풍월주는 총 32명이다. 김유신이 제15대, 김춘추(金春秋)가 제18대,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金龍春)이 제13대 풍월주였다.

풍월주 김유신은 화랑도들에게 항상 말하길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게 되면 나라에 외우(外憂, 외국의 침입)가 없어질 것이니, 가히 부귀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 김유신의 부제가 된 김춘추에게 “바야흐로 지금은 비록 왕자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가 없다”고 했다.

611년 김유신은 17세에 고구려·백제·말갈이 신라의 강토를 침범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였다. 이에 외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中嶽, 경주 서쪽 단석산)의 석굴로 들어가 수련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중악에서 수련을 할 때 난승(難勝)이라는 도사에게서 삼국을 병합할 비법을 배웠다”는 이야기와 아래와 같이 ‘김유신이 난승에게 한 말’이 수록되어 있다.

“적국이 무도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침노하여 소요를 일으킴)하니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머리가 아픕니다(痛心疾首).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민망히 여기시어 방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훗날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죽고 진골 출신 중에서 왕을 선택해야 했을 때에 군사권을 쥐고 있던 김유신이 김춘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김춘추가 진골 출신 최초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가야계 김유신을 중용한 것은 인재등용에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는 ‘포용의 인사’로 중요한 교훈을 주는 사례라 하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평생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백전백승 불패의 명장이요, 탁월한 전략가였다. 김인문은 《화랑세기》에서 이렇게 평했다.

“김유신은 가야지종(加耶之宗, 가야의 우두머리)이고 신국지웅(新國之雄, 신라의 영웅)이다. 삼한을 통합해 우리 동방을 바로잡고 혁혁한 공을 세워 이름을 남기니 해와 달과 더불어 견준다.”

경주시 충효동에 소재한 흥무공원에 흥무대왕의 다음과 같은 어록비가 있다.
‘지성공지불이 염수성지역난(知成功之不易 念守成之亦難).’ 성공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성공을 지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임을 염두에 두라는 김유신의 가르침이다.

김유신은 동북아 국제정세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었다. 당의 설인귀(薛仁貴)가 670년 동돌궐 기병 11만 대군을 이끌고 티베트고원 대비천(大非川)에서 토번(吐蕃)과 맞붙어 전멸당한 사실에 주목했다. 당은 실크로드 교역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당 주력군의 축을 만주에서 서역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이것이 당과의 전쟁을 자신 있게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670년 3월. 고구려 유민군 1만 명과 신라군 1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선제공격함으로써 7년간에 걸친 ‘나당전쟁(羅唐戰爭)’이 시작되었다. 676년 신라는 나당전쟁의 승리로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동시에 자주권을 회복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에 한정된 불완전한 것이었지만, 우리 역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혈통·언어·문화를 같이하면서도 각각 다른 국가체제 지배 속에 들어있던 우리 민족은 신라의 삼국통일로 하나의 국가 안에 통합됨으로써 민족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삼국 통일기에 신라가 당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것은 김유신의 자주국방 의지 덕분이었다. 신라가 당의 침략을 격퇴하여 한반도의 지배권을 쟁취한 것은 한국사의 자주적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신라 국민의 열망을 하나로 결집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여 오늘날 한국사회의 본류가 되도록 한 영걸이다. 두 사람의 국가경영 리더십은 적국에 포위된 신라의 존립을 위해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외교정책과 ‘이공위수(以攻爲守, 공격함으로써 수비하는 정책)’의 국방정책을 병행한 것이었다. 그 결과 당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고(660년), 고구려의 내분을 틈타 고구려마저 정복했다(668년).

신라는 1058년간 존속한 동로마제국(395~1453)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다. 7세기 신라의 삼국통일은 세 번째 완전한 한반도 통일인 ‘21세기 남북통일’과 한·중관계의 길을 비춰주는 바로미터다. 중국은 7세기에 이어 16세기(임진왜란)-17세기(병자호란)-19세기(청일전쟁)-20세기(6·25전쟁) 한반도 운명의 순간에 무력 개입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지배하려 한 당(唐)에 담대히 맞서 ‘유연한 외교’와 ‘결연한 전쟁’ 투트랙으로 한국사를 창조한 신라의 국가경영 리더십에서 ‘통일대업(統一大業)의 길’을 배울 수 있다.
ilyo@ilyoseoul.co.kr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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