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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치인 김안국 선생과 목민운하
김창호 기자  |  kore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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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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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호 기자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화두는 저탄소 녹색성장과 4대강 정비사업이다. 보다 크게 대한민국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차원에서 부들과 함께하는 목민운하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확실한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조선시대에 김안국 선생도 이를 추진했다고 전한다.

김안국 선생은 당시의 조선을 고대 홀본과 같은 무역국가로의 전략을 갖고 추진했다고 전한다. 드라마 주몽에서 홀본(※ 졸본이 아닌 忽本이 맞는 표현이라 추측됨)의 연타발을 상인의 우두머리 군장으로 우태를 단지 상단의 대행수로 그리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현대로 따지면 홀본은 지금의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니 총통과 국무장관의 역할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안국 선생 시대의 조선은 각 지역에서 자체 생산하여 조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며 약제품, 보석이나 장신구 등 특정제품만을 마차나 등짐 등의 방법으로 이동시켰다. 이러한 관계로 당시 조선은 무역의 발달은 생각조차 할수 없었고 상업조차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물길을 복원하면 상품의 대량이동이 가능하며 자원과 기술의 비교우위에 따른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므로 일본과 명나라에 비해 생산적 우위를 가져와 무역국가 체계를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안국 선생은 경기도 이천의 이포나루에서 경상도 의성의 오토산과 안동까지 조각배를 타고 다니며 물길복원을 생각했다고 전한다. 현 시대에 부들과 함께 하는 목민운하가 추진되면 김안국 선생 시대의 역할을 하기 보다는 유가가 천정부지로 뛰고 석유에너지가 고갈 위기를 대비하고 도로와 철도건설로 인한 환경파괴를 줄이고 국토의 효율성을 높일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일자리가 창출되고 수자원 확보 효과와 관광레저 산업의 활성화도 기대된다.

김안국(1478~1543,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알려져 있는 김굉필 문하의 후배 조광조가 사간원의 정6품 정언으로 있을 때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을 지냄) 선생은 조선 중종 때 대사간, 공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대제학, 찬성, 등을 지낸 인물로 ‘왕도정치의 이상’이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짓고 누애치는 지식,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의학지식, 무역과 외교를 할 수 있는 통역 능력과 천문, 역법, 병법 등의 현실적인 지식이라고 했다.

이름 안국(安國)은 “‘위자안지(危者安之)’에서 따온 말로 위태로운 사람을 안녕케 한다.”는 뜻으로 나라를 다스리거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국민이나 무리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TV 역사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당시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가들이 기생을 끼고 '지치주의'와 '왕도정치'를 이야기 할 때 김안국 선생은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농서(農書)와 잠서(蠶書) 등을 백성들이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해 보급하였다. 중종 37년에는 내의들과 함께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을 편찬하였다.

또한 의학서 「벽온방」, 「창진방」 등을 간인하여 보급하였는데 이는 후에 허준(증조부되는 허지는 김안국 선생의 외조부가 됨)의 학습서가 되고 「동의보감」 편찬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선생의 한의학적 업적은 조선시대 사대부로서는 유일하게 대한한의사협회가 선정한 한국의 의가 10인 중 한분으로 선정되어 있을 정도로 큰 것이다.

특히 김안국 선생께서는 중인 신분의 역관 최세진을 '동무'라 칭하며 가까이 하였으며, 1542년 중종 37년 최세진의 영전 앞에서는 7언율시의 만사(挽詞) '최동지세진만(崔同知世珍挽)'을 읊기도 하였다. 「훈몽자회」의 저자 최세진은 지금은 국문학사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로 존경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1품 벼슬의 사대부와 중인신분인 역관과의 친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1541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외세 침입에 대비해 천문, 역법, 병법과 관한 서적의 구입과 국력 신장을 건의하였다. 특히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백성들도 글을 사용해야 하며 문화의 대중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손수 물이끼와 닥을 화합하여 태지(苔紙)라는 값싸고 질 좋은 종이를 만들어 사용을 권장하였다.

언젠가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한 교육부 관리가 청소년들에게 추천할만한 직업으로 '경영컨설턴트, 회계사, 변호사, 애널리스트, 광고기획자, 인터넷정보검색사, 카피라이터, 외환딜러, 건축사, 변리사 등'만을 거론하는 것을 보고 오늘 나라가 어렵게 된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지금 농촌에는 젊은 농부가 없다고 한다. 공장에는 외국인 근로자만 가득하다. 누가 오늘 우리의 농촌과 공장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을 빼앗아 갔을까?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도 가장 비천하게 취급하던 향소부곡의 장인들이나 하던 종이 만드는 일을 손수한 장관이 있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태왕은 청년시절 마굿간쟁이였으며, 평강공주와 결혼한 온달장군과 백제 무왕(서동)과 온달장군은 마캐던 소년이었다. 또한 명재상 을파소는 농부였으며,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한 미천왕은 소금장수 출신이다.

김안국 선생은 “한집안의 번영은 자녀의 교육으로 보장되며, 빈부귀천과 재질을 따질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교육은 필수적이다. 소질에 따라 무슨 직업이든 가르치면 한집안의 생계는 확보되며, 부유한 집과 벼슬 높은 집도 교육을 소홀히 하면 망한다. 금보다 책을 상속함이 낫고, 기름진 논밭보다 작은 재주가 낫다”고 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도 새겨야 할 지혜의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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